"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쓰러져 간다.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도 10년 후에는 사라질 것이다. "

이건희가 돌아왔다. 위기경영의 대가(大家)답게 복귀 일성도 '위기'였다. 1993년 '신경영'을 주창할 때도 그랬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는 물론,반도체시장을 평정하며 삼성이 비상(飛翔)을 시작한 2000년대 중반에도 그는 위기를 외쳤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바꿔 삼성전자를 세계 전자업계의 리더로 키워냈다.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 실적을 낼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는 때 이 회장은 다시 위기라며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그가 생각하는 삼성의 위기는 무엇이며,승부수는 어떤 것일까.

◆"미래가 안보인다"

그가 택한 자리는 삼성전자 회장이다. '삼성그룹 명예회장으로 복귀할 것'이라던 일각의 예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명예'자도 붙이지 않았고,그룹도 아닌 현업에 곧바로 뛰어들었다. 삼성그룹 간부는 "그만큼 절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이 절박감을 느낀 것은 '10년 후 삼성'에 대한 준비 부족이다.

이 회장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미래 준비'를 입에 달고 다녔다. 그리고 실천도 해왔다. 삼성전자가 반도체,TV,LCD 시장에서 세계 1위에 오르기까지 이 회장이 최일선 주역을 맡았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장기적이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주인공이 그였다.

그런 이 회장이 본 삼성의 미래준비는 한마디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지난 1월 미국에서 기자들과 만났을 때다. 삼성이 10년 후 준비를 잘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턱도 없다"고 답했다.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삼성이 위기에 빠지면 직접 나서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두 달여 만에 돌아왔다. 결론은 미래에 닥쳐올 위기였다.

실제 삼성의 미래사업이 뭐냐고 물으면 자신있게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바이오,태양광,나노산업,그린 에너지사업 등 무수한 후보들이 있지만 그저 후보일 뿐이다. 신사업추진단도 만들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못내고 있다. 한 직원은 "예전처럼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다.

이 회장은 여기서 자신이 할 역할을 찾은 셈이다. 신사업의 구심점이 그것이다. 최근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컨버전스시대와 이 회장의 역할도 맞닿아 있다. 컨버전스 시대 신사업 발굴은 한 계열사가 독자적으로 하기는 불가능해지고 있다. 어느 때보다 계열사 간 협력을 통해 가치사슬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한 시점이다.

◆도요타,구글,애플

최근 도요타의 위기 등 글로벌 산업의 지각변동도 이 회장의 위기감을 부추겼다. 이 회장은 그룹 사장단의 경영복귀 건의를 받아들이며 "삼성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만 보고 가자"고 말했다. 도요타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 것을 보며 큰 충격을 받은 것이란 관측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일본 기업을 벤치마킹하며 삼성 성장을 이끌어온 이 회장에게 일본 최고 기업이 휘청거리는 것은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미국의 자존심이었던 제너럴 일렉트릭(GE)을 전설로 만들어버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애플과 구글의 도전도 이 회장이 충격을 받았을 만한 대목이다. 애플은 소프트웨어와 디자인만을 갖고 세계 전자시장을 뒤흔들고 있고,구글은 세계 정보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또 다른 권력이 돼가고 있다. 반면 삼성은 휴대폰 소프트웨어조차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다. 과거 회장 시절 매년 '선진제품 비교전시회'를 열어 경쟁사 제품의 장 · 단점을 하나하나 분석했던 이 회장이 받았을 충격은 짐작할 만하다는 게 삼성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여기에 엔고(高)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 최고의 전자왕국 자리를 되찾으려는 소니 도시바 파나소닉 등 일본 업체의 반격이 자극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수술이 필요한 공룡

삼성전자 실적이 좋다고 하지만 곳곳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이 회장의 복귀와 무관치 않다. 반도체부문은 수익 악화를 감수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치킨 게임'을 벌였지만,기대했던 승자독식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엘피다는 다시 살아나 생산량을 늘리며 재도전 채비를 갖추고 있다. 도시바는 낸드플래시 부문에서 이미 삼성을 앞질렀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고,하이닉스는 수율(불량률의 반대) 면에서 삼성을 따돌렸다. 지지부진한 반도체 전략에 대해 삼성 내부에서도 "치킨게임에서 누구를 죽일지 모르고 우왕좌왕한 끝에 반격의 빌미를 줬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휴대폰은 세계 2위까지 갔지만 스마트폰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애플이 3년 전 아이폰을 내고 대만의 HTC조차 수년 전부터 준비를 해왔지만,삼성은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했다. 스마트폰이 휴대폰 시장의 대세가 되면서 삼성의 위기감은 더해졌다.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또 LCD는 이미 중국 제조사를 중심으로 과열경쟁에 들어가 더 이상 큰돈을 벌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TV만이 압도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본 회사들이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어 어느 부문 하나 마음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