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삼성그룹 임원인사의 특징은 부사장-전무 승진폭이 유난히 컸다는 점이다. 부사장 32명,전무 88명 등 '뉴 삼성'을 이끌어갈 CEO 후보군을 120명이나 발탁했다. 삼성 관계자는 "조직의 역량을 배가하고 예비 경영자들의 자체 경쟁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은 또 여성,외국인,나이를 가리지 않고 실적과 능력에 따라 인사를 실시함으로써 '순혈주의'를 탈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재계는 예상과 달리 오너 일가의 파격적인 승진이 없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보수적인 삼성의 인사문화가 여실히 드러났다는 관측도 제기하고 있다.


◆전자,사업 전 분야에서 발탁

삼성전자의 부사장 승진자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인물들로 짜여졌다. 대표적인 사람은 남성우 컴퓨터시스템 사업부장으로 일찌감치 승진 1순위로 꼽혀왔다. 올해 초 컴퓨터 사업부장을 맡아 2조7000억원대에 머물던 PC사업을 4조2000억원 규모로 키워낸 성과를 인정받았다. 사내에서 경영혁신 전문가로 통하는 남 부사장은 사업부로 나오기 전까지 줄곧 삼성전자의 물류 및 공급망 혁신을 주도해왔다.

이종석 글로벌 마케팅실장은 P&G,켈로그,존슨&존슨 등에서 15년간 마케팅을 담당하다 지난 2004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5년 만에 부사장에 올랐다. 입사 당시 소비재 마케팅이 전자업종에서도 과연 통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삼성전자가 선진 마케팅 회사로 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재권 무선구매팀장은 입사 후 줄곧 구매업무만 맡아온 전문가다. 구매 프로세스 혁신을 통해 고품질의 TV를 소비자들이 원하는 가격에 공급하는데 일조했다. 올해 초부터는 휴대폰 경쟁력 향상을 위한 구매업무까지 겸하고 있다.

연구개발 부문에서는 전영현 메모리사업부 D램개발실장이 부사장으로 승진,차세대 테크노 경영진 대열에 합류했다. KAIST 출신인 전 부사장은 2000년 입사후 삼성전자 D램 제품 개발을 주도하면서 D램 시장의 지배력을 높이는 데 역량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극일(克日)도 승진 기준

다른 전자계열사도 실적이 좋은 부문에서 부사장 승진자가 나왔다. 삼성SDI 2차전지 부문을 세계적 강자로 끌어올린 이진건 전지마케팅 팀장은 전무 승진 3년 만에 부사장으로 발탁됐다. 이 부사장은 최근 수년간 매년 목표 이상의 영업실적을 기록하며 삼성SDI가 2차전지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세계 2위 업체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공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삼성전기가 올해 사상 최대 실적을 내는데 기여한 최치준 LCR사업부장도 승진 대열에 합류했다. 최 부사장은 삼성종합기술원 시절부터 20년 가까이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개발에 주력,일본업체들을 제치고 삼성전기가 세계 2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성과와 능력으로 말한다"

비(非)전자 계열사들 중에는 그룹 최초의 여성 부사장인 최인아 제일기획 전문위원도 눈길을 끈다. 1961년생인 최 부사장은 이화여대를 나와 1984년 제일기획 공채로 입사했다. 2000년 공채 출신의 최초 여성 임원이 되면서 개인 프로필에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이 늘 붙어다닌다. 여성인력 우대를 표방하고 있는 삼성 경영의 상징적 존재이기도 하다. 현재 맡고 있는 업무는 국내 광고 크리에이티브 분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안할 자유'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등의 카피를 제작했다.

삼성중공업에서는 이현용 조선해양영업 총괄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1977년 입사한 이 부사장은 지난 2006년 해외영업을 맡아 해외수주를 대폭 늘리면서 한때 존폐 얘기까지 나왔던 삼성중공업을 조선업종의 강자로 끌어올렸다. 올해 전 세계 조선업계가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기 전까지 그는 연평균 70%의 수주 증가를 이끌었다.

삼성물산 부사장으로 승진한 김창수 기계플랜트 본부장은 최근 불황에도 잇따라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한 공을 인정받았다. 김 부사장은 멕시코 만사니오 LNG 가스터미널 인수 기지,호주 담수화 사업 등 신사업 프로젝트를 이끌었으며 최근 삼성물산이 카자흐스탄 발하쉬 화력발전소 우선협상자로 선정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금융계열사 중에는 삼성증권 반용음 부사장이 눈에 띈다. 반 부사장은 강남지역사업본부장과 CFO를 역임하며 현장과 경영 부문을 두루 경험했고 올해부터는 삼성증권의 핵심사업인 리테일 사업부를 총괄하고 있다. 올해 삼성증권의 대표상품인 선진자산관리 시스템 POP을 내놓으며 고객을 대거 유치하는 성과를 올렸다. 삼성생명에서는 재경부 과장 출신인 곽상용 법인영업 본부장이 부사장으로 발탁됐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