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온스(28.35g)=1062달러(약 123만원).'

금값이 무섭게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 미국 경제의 추락과 달러화 가치 하락으로 투기적 금의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매력이 떨어진 달러 대신 금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세계 패권의 핵으로 금이 재부상하는 모습이다. 영원불멸하고 안정적이며 희소성 있는 금이 30여년간 세계 기축통화로 위세를 떨쳤던 달러를 제치고 권좌에 복귀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금융전문가 찰스 고예테는 곧 출간 예정인 저서 '달러 붕괴(The Dollar Meltdown)'에서 "탄광 붕괴 위험을 알리는 카나리아처럼 금이 달러 몰락을 예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금값 급등은 달러 기축통화에 문제가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세계에 던지고 있다는 얘기다.

◆인류를 지배해온 황금의 역사

인류 역사의 핵심엔 항상 금이 있었다. 고대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의 국교화가 아니라 제우스 신전에 가득했던 황금이 진짜 목적이었다. 극심한 재정난을 겪던 로마 제국은 항상 금에 목말라했다. 금을 확보함에 따라 로마 재정은 탄탄해졌고,솔리두스란 금화를 통해 700여년간 지중해 무역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십자군 원정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로부터 탈환하겠다는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됐지만 11세기부터 3세기 동안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랍의 풍부한 금을 손에 넣기 위한 봉건 영주들의 탐욕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금 때문이었다. 지독한 '황금광(狂)'이었던 그는 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전설의 황금섬으로 소개한 지팡구(일본)를 찾아 여러 섬을 전전했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뒤 그는 "신대륙에서 발견한 금의 10%를 갖겠다"는 자신의 뜻을 스페인 황제가 꺾어버리자 불같이 화를 낼 정도로 황금에 집착했다.

금이 힘을 얻은 건 기원전 2~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중국 상인들이 금 보관증 용도로 점토판을 사용하면서 금이 비로소 '빛나는 돌'에서 '가치 있는 돈'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의 원소로 돼 있어 변색이나 녹이 슬지 않는 금은 역사 시대 이전부터 이미 화폐의 역할을 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자연발생적으로 인류가 금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하면서 금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시작됐다.

16세기 금은 군사력이나 농업보다 우선시되는 국력의 원천이었다. 프랑스는 '국부는 금에서 나온다'는 생각으로 전 세계의 황금을 끌어모으기에 안간힘을 썼다. 상업을 통해 부를 키웠던 중상주의는 사실 금을 좇는 중금(金)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 때마다 주목받는 금

1819년 금본위제가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면서 금은 확고한 돈의 지위를 얻었다. 변하지 않고 국적이 없으며 언제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다는 특성 덕에 금이 화폐의 가치를 재는 기준으로 자리매김했다.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은 "금 이외의 어떤 표준과 기준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산업화가 무르익은 20세기,더 이상 한정된 금으로 전 세계 통화량을 감당할 수 없자 1971년 브레턴 우즈 체제(금본위제)가 붕괴,화폐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금은 여전히 위기 때마다 몸값이 치솟으며 '무적화폐'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오일쇼크가 반복될 때마다 금 수요가 폭증했고 대공황과 경기 침체로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질 때마다 '황금 시대'는 화려한 부활을 거듭했다.

금값 널뛰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최근 상품 투자의 귀재인 짐 로저스는 "금값이 온스당 2300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마켓워치는 최근 미국 재야투자자의 의견을 인용,"1970년대 금 강세장 때 상승률을 적용하면 금값이 온스당 5800달러까지 뛸 수 있다"고 보도했다.

◆금력(金力)은 국력?

세계 10대 금 보유국을 살펴보면 세계를 주름잡는 강대국들이 고스란히 포함돼 있다. 여전히 '금력(金力)=국력'이란 공식이 성립하는 증거다. 미국은 외환보유액 가운데 금 비중이 76.5%(8133.5t)에 달한다. 독일(64.4%),이탈리아(61.9%),프랑스(58.7%) 등도 금력 키우기에 한창이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 달러 패권에 기초한 기존 경제질서가 붕괴할 것이란 우려감이 높아지면서 금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금 생산국으로 떠오른 중국은 자국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금을 공격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중국의 금 보유량은 600t 규모로 세계 8위에 해당한다. 아시아 신흥국의 경제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안전자산을 찾는 전 세계 금 수요는 더욱 증가하고 있다. 금값이 폭등하는 이유다.

일부에선 달러화를 대체할 기축통화를 만들기 위해 금본위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화폐전쟁'의 저자인 중국의 쑹훙빙은 "금에 기초하지 않은 화폐는 쇠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앞으로 금이 국제 통화 바스켓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세계 경제규모 13위,10위의 무역대국인 한국의 금 보유 순위는 51위에 머무르고 있다. 외환보유액 중 금 비중은 불과 0.01%(14.3t)에 그친다. 장기적으로 금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정책적 논의가 한창이다. 물론 금이 당장 국제 결제 수단으로 인정될 가능성은 낮다.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영향력과 군사 · 정치적 파워,달러화의 우월적 지위를 고려하면 '금의 달러 제치기'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금에 대한 집착을 비판했다. "한 나라의 부유함은 귀금속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국민들이 소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채굴이 쉬운 곳에 매장된 금은 이미 대부분 캐낸 상태다. 바위 250t을 파헤쳐야 1온스가 나올 정도로 금은 희소하다. 황금을 향한 인류의 끝없는 욕망이 글로벌 경제패권과 통화체제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지켜볼 일이다.

김미희 기자 icii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