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6월10일 한국가스공사 이사회.

한갑수(현 농림부 장관) 사장이 ''99년도 예산전용(안)''을 이사회에 제출하고 이런 제안 설명을 했다.

"정부가 북한에 비료를 지원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국고에서 바로 지원하기 어려워 민간을 대상으로 모금하고 있는데 실적이 부진하지요. 그래서 관계부처 장관들이 회의를 열어 5대 재벌과 4대 공기업이 내도록 하자는 결론을 냈습니다. 공기업에 떨어진게 모두 30억원입니다. 우리(가스공사)는 7억8천만원을 부담하게 됐습니다.
주주(정부)가 결정한 사항이니 다른 의견이 없으면 원안대로 의결하겠습니다"

이사회 멤버들은 한 사장의 제안 설명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는 기부금을 낼 때 모든 공기업이 매출액을 기준으로 나눠 낼 수 있도록 정부에 건의해 보자는 얘기가 있었을 뿐이다.

기부예산 잔액이 부족하니 나머지 부분을 다른 예산에서 전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사장의 요청은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한나라당 김학송 의원이 올해 국정감사에서 파헤치기 전까지는 회의록에 묻혀 있던 일이다.

공기업의 효율 경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정부는 주주 권한을 내세워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간섭하려 든다.

감시와 감독의 차원을 넘어선 부당한 간섭과 요구가 많다보니 공기업은 ''동네북''이 돼버렸다.

정치권은 공기업을 ''내 회사''처럼 생각한다.

상장된 공기업이 늘어나면서 경영 간섭이 줄어드는 추세라지만 정부와 정치권의 ''제 몫 챙기기''는 여전하다.

국민의 혈세(공적자금)를 관리하는 예금보험공사나 자산관리공사도 정부의 경영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2월17일 예금보험공사 운영위원회.

동아생명을 금호생명에 넘겨 처리하자는 의제가 올라 왔다.

대다수 운영위원들은 금호생명에 동아생명을 넘기는 것이 앞으로 더 큰 문제를 만든다며 반대했다.

아예 보험금을 지급하고 청산해 버리자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원안은 그대로 통과됐다.

금융감독위원회가 이미 금호생명과 양해각서(MOU)까지 맺어 놓은 뒤였기 때문이다.

정작 동아생명의 주인인 예보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운영위원회는 영문도 모른채 거수기 역할만 한 셈이다.

한국토지공사는 베트남 공단개발 사업에 나섰다가 낭패를 봤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이야기다.

당시 정부는 노 대통령의 북방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공기업들을 동원했다.

토지공사도 지난 92년 사업성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은채 서둘러 뛰어들었다가 투자비만 떼인채 97년말 철수해 버렸다.

토지공사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도 부산 인근의 양산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지역 공약 사업''에 나섰지만 분양이 안돼 아직 1조5천억원이 넘는 투자비가 땅에 잠겨 있다.

정부와 정치권의 압력이 이 정도이다 보니 공기업 사장에게 소신 경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장영식 전 한전 사장.

그는 정부의 눈밖에 나 옷을 벗은 대표적인 공기업 사장이다.

소신 경영을 표방하며 거침이 없던 장 사장은 당시 박태영 산업자원부 장관과 전력산업 구조개편 및 신규 원전 입지선정 문제 등을 놓고 심한 갈등을 빚은 끝에 지난해 4월 사표를 냈다.

장 사장은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떠나는 것이 창피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다"는 이임사를 했다.

한 퇴직 공기업 사장은 "상전(정부와 정치권)이 쏟아내는 요구와 지시에 치여지내다보니 회사 경영은 늘 뒷전이었다"며 "특히 인사청탁에 맞서는게 가장 힘들었다"고 한탄했다.

신규채용 인사 청탁도 만만치 않지만 내부 인사 청탁이 많다.

공기업마다 ''줄서기''와 ''편가르기''가 판을 치는 이유다.

산업연구원 조창현 박사는 "포철처럼 어정쩡한 형태가 아니라 확실한 주인을 찾아주는 방식의 민영화가 아니면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김수언 기자 sookim@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