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등 구제금융 지원국가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자구
노력 이행조건(conditionality)은 과연 합리적인가.

최근 미국 경제계에서 이같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IMF가 1일 새벽 한국 정부와 마라톤 협의끝에 확정지은 이행조건
내용이 알려지면서 이를 둘러싼 논쟁은 더욱 가열되고 있다.

IMF는 한국측에 <>총통화 증가율을 현재의 18%에서 10%선으로 끌어내리는등
통화및 재정긴축을 강화하고 <>단기채및 국공채 시장을 추가로 여는등
자본시장 개방을 확대할 것 등을 요구했다.

IMF는 이에 앞서 태국 인도네시아등에 대해서도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조건
으로 재정 삭감과 대외 차입금 축소,경상적자 억제 등을 주문한바 있다.

이같은 IMF의 "처방"에 대해 일부 미국 경제전문가들은 "경제적 약자에
대한 징벌적 성격이 강하며 자칫 상황을 오도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버드대 국제개발연구소의 제프리 삭스 교수는 최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재정 삭감과 통화량 축소는 금리 급등을 야기하고 상당기간 경제
침체를 몰고올게 뻔하다"며 "이는 해당국들에 득보다 실이 많은 고통스런
조치"라고 비판했다.

워싱턴포스트도 지난달 29일자 특집기사를 통해 "IMF는 이제까지 중남미와
옛 소련.동구권 등 중앙집중적 경제체제를 시행해온 국가들의 금융사태에
주로 개입해 왔다"며 "따라서 높은 성장을 시현하고 민간부문이 왕성하게
활동해온 아시아 경제에 적절한 처방전을 내리기에는 경험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삭스 교수는 이와관련, IMF가 지원대상 국가들에 "단골 처방전"으로 제시
하고 있는 "국내 저축 증대와 통화급락 예방등을 위한 이자율 인상및 재정
긴축"이 이같은 모순의 대표적 예라고 지적한다.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중남미나 옛 소련.동구권 국가들과 달리 재정을
보수적으로 운영해 온데다 민간부문 저축률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다는
것.

워싱턴 소재 경제정책연구소의 이코노미스트 로렌스 치머린도 "아시아
국가들은 결코 무모하게 재정을 운영하지 않아 왔다"며 이같은 지적에 동의
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이같은 주장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최근 맞고 있는
일련의 금융 위기가 내부적인 정책 실패 못지않게 국제 핫머니의 급격한
이동 등 불안정한 세계금융시장의 "유탄"을 맞은데 따른 측면도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삭스교수는 "최근 몇년동안 아시아에는 관련국가들이 감당키 힘들 정도로
국제 단기자금들이 유입돼 왔다"며 "이들 자금이 순간적으로 빠져 나간 것이
아시아 금융위기의 1차적 근인"이라고 진단한다.

실제로 IMF 통계에 따르면 아시아시장에서는 80년대 중반만 해도 해외자금
순유입 규모가 1백20억달러선에 불과했으나 96년에는 9백84억달러로 급증
했다.

IMF측은 일부 전문가들의 이같은 지적에 대해 "납득할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상당수 아시아 국가들이 최근 재정을 방만하게 관리해 왔으며 수입이 급증
하고 단기 외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등 "이상 증세"를 보여 왔다는 것이다.

IMF의 샤일렌드라 안자리아 대외담당 국장은 "무엇보다도 아시아의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정부 지원"만을 믿고 무리한 투자를 감행해 왔다"며
"이런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재정 긴축등 고통을 감수하는게 불가피한
일"이라는 입장이다.

95년 멕시코 통화위기 당시 미국 재무차관보를 지낸 살러먼브러더스증권의
제프 셰이퍼 부회장도 "해당국가의 국민들에게 고통없이 현재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어떤 발언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
며 IMF측의 입장에 동의하고 있다.

이처럼 IMF의 구제금융 이행조건에 대한 논란은 "정답"이 없는 채로 가열
되고 있지만 양 진영간에 공통된 점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아시아 국가들의 위기는 "대외 신뢰의 결여"에서 초래됐다는 것이다.

투명치 않은 정책과 지속돼 온 정경유착 등이 해외 투자자들의 불신을
누적시킨 끝에 지금의 "재앙"이 닥쳐 왔다는 지적이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로버트 라이턴 연구위원은 "아시아 국가들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금융관행을 쇄신하고 국제적인 재정 기법을 도입하는 등 뼈저린
자구노력을 기울이는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지적했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