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흥은행이 19일로 창립 1백주년을 맞는다.

국내 법인기업중 사상 처음이다.

조흥은행은 개화기에 탄생해 일제시대 6.25전쟁 경제개발 등과 역사를 같이
해온 국가근대화의 산증인이다.

그래서 민족이 고난을 겪을때 아픔을 같이했고 경제성장으로 커갈때 과실도
함께 누렸다.

근대 금융이 뿌리를 내린 것도 조흥은행의 공로로 일컬어진다.

조흥은행은 지난 82년 장영자사건, 83년 영동개발사건 등 잇따른 금융사고로
창립후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위기를 극복하고 현재는 어엿한 리딩뱅크
(선두은행)로 자리잡았다.

조흥은행은 1897년 2월19일 독립협회 발기인이던 김종한 민영찬 조재명
한치조 이승업 김영모 이규정 김태진 권석영 등 민족 선각자 9명에 의해
한성은행으로 출발했다.

설립목적은 "국가 부강의 기초를 다지고 동족의 생업보호를 위한다"는 것.

그로부터 6년후인 1903년 2월10일 "공립한성은행"으로 개편됐고 43년
10월1일 9개 민족은행이 모여 "조선을 일으켜 세운다"는 뜻을 안고 조흥은행
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조흥은행은 성장과정에서 해동 한성 대구 구포 주일 한일 호서 호남
동래은행 등을 활발하게 흡수합병, 은행 M&A에 가장 성공한 국내은행으로도
불리어지고 있다.

그러나 조흥은행은 6.25동란으로 국토가 양분되면서 북한에 소재하고 있던
평양 함흥 원산 해주 등 14개 점포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54년 국내은행 최초로 외국환업무를 취급한후 82년엔 신용카드 84년엔 신탁
등으로 업무를 확대하며 양.질면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뤘다.

78년엔 보통 저축예금 온라인 개통으로 업무전산화를 시작한 이래 84년
전영업점 업무를 전산화하는데 성공했다.

조흥은행은 92년에 은행경영 진단을 실시, 93년부턴 소매금융중심으로 은행
경영전략을 전면개편했다.

리딩뱅크에 오른 것은 이처럼 꾸준히 진행해온 경영혁신에서 비롯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 국내외에 유무인점 1천2백54개 해외지점 19개 등을 갖고 있다.

자본금은 국내은행중 가장 많은 9천3백4억원이며 총자산은 52조원규모,
직원수는 8천9백50명.

자회사는 조흥증권 등 9개를 보유, 종합금융그룹을 모색하고 있다.

조흥은행은 "21세기 세계 초일류은행"이란 비전으로 새로운 1백년을 준비
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