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또다시 세계무역기구(WTO)제소 카드를 들고 나왔다.

지난 4일 수입농산물 통관문제로 WTO에 제소한 지 한달도 채 못돼 미국은
한국의 육류 유통기한제도를 두번째 "제물"로 걸고 넘어졌다.

물론 이번 제소는 전혀 예상밖의 사안은 아니다.

26일부터 3일간 열린 한미무역실무회담에서 한국측이 만족할 만한 대안을
내놓지 않을 경우 곧바로 WTO에 제소하겠다는 입장을 이미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측은 이번 회담에서 나름대로 많은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통상당국자들도 이번 제소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이번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두가지 쟁점때문.첫째는 냉동육류의 잠정 유통
기한문제다.

미국은 오는 98년까지 업계자율로 유통기한을 설정하기 전까지 잠정유통
기한을 12개월로 일괄적용할 것을 한국에 요청했다.

이에 대해 한국은 교역규모가 가장 큰 쇠고기의 경우는 이미 12개월로
시행하고 있다며 나머지 품목은 9개월정도가 적당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은 그러나 품목별 육류유통기한이 제각각이어서 이를 12개월로 통일
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특히 대한수출규모가 큰 "양념닭고기"의 경우 1개월, "뼈가든 냉동
닭고기"는 9개월, "닭고기 너게트"는 아예 유통기한 표시가 없다며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두번째 결렬요인은 냉동감자(프렌치프라이) 피자 파스타등 비육류 냉동
식품 유통기한 문제다.

미국은 이들 식품의 유통기한을 올 가을부터 제조업자 자율로 하도록 요구
했다.

한국은 이에대해 "올 가을"은 시간상 불가능하며 내년중반쯤이면 시행할수
있다고 제의, 미측의 양해를 구했으나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문제는 한미간 쌍무협상으로도 충분히 협의할수 있는 사안을 왜 굳이 WTO
에 가져가느냐다.

육류 유통기한은 우리측이 98년까지 업계자율로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번 회담에서도 가급적 추진일정을 앞당기겠다는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미국측으로서도 "WTO로 간다해도 최종해결까지는 1년반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미업계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있다"(외무부 고위
당국자)는 지적이어서 궁금증은 더해만 간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배경론"이다.

미국이 한국을 "유난스럽게" 물고늘어지는 것은 한국을 제일 만만하게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미국은 한국이 WTO제소를 실제이상으로 두려워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장기호 외무부통상국장)는 분석이 바로 그런 맥락이다.

한국이 WTO제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점을 이용, 최대한 얻어내려 한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대한강성기류와 관련, 또하나 거론되고 있는 것은 미국내정치 상황
이다.

클린턴정권의 대외경제 치적중 하나인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가 페소화
폭락사태로 빛을 잃자 미국은 세계무역기구(WTO)를 최대한 활용, 이를
국익의 방패막이로 삼아야 하는 부담이 생겼다.

그 첫번째 대상이 한국이라는 분석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한국의 통관 검역 유통기한제도등 2차수입장벽을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워 앞으로도 WTO제소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선준영 외무부제2차관보는 "올해말까지 수십건이 터질 것"이라고 말해
미국이 앞으로 "줄줄이 사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올 가능성이 클
것으로 진단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정부도 "앞으로 당하고있지만은 않겠다"는 강경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회담말미에 정부가 대응자세를 급선회한 것이 그 단초를 제공한다.

회담대표단은 회의 이틀째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유통기한 문제를 타결지을
자세였다.

그런데 회의 마지막날 한국측은 "WTO제소땐 당당히 맞서겠다"며 강성자세로
돌변했다고 한다.

장국장은 회담직후 기자간담회에서 "통상주권론"을 거론하기도 했다.

미측 회담대표였던 크리스티나 런드미무역대표부(USTR) 한국담당국장은
한국의 급격한 태도변화에 다소 놀란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 정부의 한 당국자는 "김영삼대통령이 최근 홍재형부총리에게
"언론에 왜 자꾸 한국이 미국한테 밀리는 것으로 보도되나. 당당하게 대응
하라"고 주문했고 이같은 메시지가 대표단에 전달된 것 같다"고 밝혔다.

이런 배경때문에 앞으로 농산물 자동차 금융등 1.2.3차 산업을 망라한
미국의 총공세에 한국도 맞대응함으로써 한미통상관계는 강경대강경 구도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 김정욱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