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5백1억1백만원".

지난 93년 제일은행은 입찰서류에 이만한 돈을 선뜻 적어냈다. 제출처는
상업은행.바로 상업증권(현 일은증권)인수대금이었다.

이 액수를 보고 다른 은행들은 입이 딱 벌어졌다. 회사가치에 비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실제가 그랬다.

상업은행조차 상업증권의 최저입찰가를 평가액보다 훨씬 많은 3천5백억원
으로 설정했다.

유찰이 돼서 팔지 않았으면 하는 속내가 반영된 탓이었다.

그러나 제일은행은 이런 과도한 요구를 주저없이 받아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종합금융그룹완성에 필수적인 증권회사를 인수할 기회가 언제 다시
오겠냐는 것이다.

비단 제일은행만이 아니다.

아직 증권사를 갖고 있지 않은 은행 모두가 증권사확보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어쩔수 없이 증권사를 팔아 치운 상업은행과 서울신탁은행이 땅을
치고있는건 물론이다.

증권사가 없으면 경쟁에서 뒤질것이란게 은행들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같은 은행들의 집념에 비해 실제 증권사를 거느리고 있는
은행은 아직 적다.

조흥(조흥증권) 제일(일은증권) 한일(한일증권) 신한(신한증권)
보람(보람증권) 산업(산업증권) 장기신용은행(장은증권)등 7개 뿐이다.

국내 32개 증권사중 21.9%에 불과하다.

단지 숫자만이 아니다.

내용을 뜯어보면 말그대로 보잘것 없는게 은행계증권사다.

국내 증권회사들은 지난 93회계년도(3월결산)에 사상최대인 총6천5백
6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그러나 7개 은행계증권사는 8백59억원의 이익을 내는데 그쳤다.

가장 많은 이익을 낸 대우증권(8백59억원) 1개사와 똑같은 실적이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3.2%.그중 나았다는 상업증권(1백67억원)의
이익랭킹은 고작 12위였다.

외형도 마찬가지다.

지난해말현재 32개 증권사의 주식약정액은 3백45조4천1백75억원에 달하고
있다.

이중 7개 은행계회사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13.4%.가장 많다는
한일증권(9조1천4백80억원)조차 전체의 14위에 그치고 있다.

나머지는 18위(보람증권)에서 24위(산업증권)로 "도토리 키재기식"경주를
벌이고 있다.

이처럼 은행계 증권사들이 대기업계열회사들에 비해 실적이 떨어지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은 "바탕"이 취약하다.

다 쓰러져가는 회사를 인수한게 대부분이어서다.

"밑천"도 보잘것 없다.

7개 회사의 납입자본금은 총7천1백28억원이다.

전체(3조6천4백73억원)의 19.5%에 불과하다.

일선에서 영업을 책임질 직원과 점포수도 형편없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큰 요인은 회사에 주인이 없다는 점이다.

모회사인 은행에도 주인이 없는 실정이니 증권사를 책임지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다.

최고경영자의 "수명"은 경영능력과 관계가 없다.

은행에서 밀려나오는 임원이 있으면 그냥 "용퇴"하는게 관행이다.

그러니 직원들의 파이팅이 떨어지고 파이팅저하는 실적부진으로
나타난다.

영업내용을 들여다보면 "주인없는 배"의 실상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7개 회사 대부분 주식중개 주식.채권운용 주선및 인수 국제업무등
백화점식 메뉴를 내걸고는 있다.

그러나 실상은 법인고객위주의 주식중개업무가 대부분이다.

그것도 모은행의 의뢰분이 태반이다.

만일 은행이 "지원"을 끊는다면 생존에 문제가 생길수밖에 없다.

이런 실정에도 불구하고 은행계 증권사의 성장가능성이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모은행의 거미줄같은 지점망이 든든한 "빽"이다.

은행 증권 리스사를 연결한 "패키지상품"도 얼마든지 만들수 있다.

한 기업체에 대해 은행에선 돈을 빌려주고 증권사에선 회사채발행과
공개등을 주선하고 리스사에선 설비를 대여해주는 식으로 말이다.

이를 위해선 증권사에 대한 모은행의 의식변화가 필수적이라는게
중론이다.

최근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한일증권의 배경에는 한일은행의
"증권사키우기노력"이 자리잡고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기에 더욱
그렇다.

< 하영춘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