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의 A사무관(42). 그는 지난달 30일 15년간
몸담았던 기획원을 떠났다. 다른 경제부처의 모외청으로 발령을 받아
자리를 옮긴 것. 물론 자원인사였다.

A사무관이 외청으로의 갈 것을 결심한건 두달전쯤. 외청조직이 늘어 전보
희망자 신청을 받는다기에 번쩍 손을 들었다. 불혹의 나이가 넘도록
젊음을 바쳐 일했지만 과장승진은 손에 안잡히고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정책업무에 회의를 느껴오던 차였다.

자리를 옮긴 외청에선 5년만 근무하면 특정자격증도 얻을수 있어
언제든지 공무원을 때려칠수도 있기에 더욱 끌렸다.

A사무관이 전보신청을 할때 갈등이 없었던건 아니다. 그래도 국가경제
정책을 다루는 최고 경제부처에서 근무하던 그가 외청으로 간다면 남들이
"패배자의 도피"로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괴롭기도 했다.

하지만 A사무관은 최근 공정거래법 개정안 작업을 하면서 마음을 완전히
굳힐수 있었다.

사무관들의 다양한 정책아이디어가 위로 올라가며 여과 선택되는게
아니라 위에서 일방적으로 떨어진 가이드라인에 따라 개정안 문구작성만
하는 자신과 동료들을 보며 더이상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후회없이 기획원을 떠났다.

"책임만 있고 권한은 없는 자리" "사무는 전혀 볼수 없고 사무에만
몰두해야 하는 사람". 사무관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일컫는 말이다.

관료조직의 초급간부로 사실상 주무이자 소속된 과에선 온갖 살림살이
까지 챙겨야 하는 사무관.

"사무관 행정"으로 불리는 한국관료조직에서 실제로 대부분의 정책들이
사무관의 손을 거쳐 모양새를 갖춘다. 그래서 사무관들은 정책일선의
소총수라고도 불린다.

전쟁터에서라면 가장 목숨을 바쳐 돌진해야 하는게 사무관이다. 이렇게
"전장 일선"에서 전투를 치뤄나가다 보면 전략까지는 몰라도 전술에 대한
스스로의 "아이디어"가 생기게 마련.

"앞으로 간부가 되면.... "이란 자리욕심이 생기는건 단지 "승진 그
자체"에 대한 집착만이 아닌건 분명하다.

"공무원은 승진하는 맛에 하는것 아닙니까. 내가 결정한 정책이 현장에서
집행되는 걸 보며 보람도 느끼고 싶고요. 근데 승진이요?

장차관은 그만두고 국장이나 한번 해보고 나갈수 있을지.... 10년이상을
똑같은 직급으로 일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떨땐 일할 맛도 안납니다.

심지어 을지연습(CPX)기간중 간부들의 유고가 많은 가상 조직표를 보고
이 시나리오가 현실이었다면 하는 끔찍한 생각마저 들정도 입니다"
(재무부 P사무관.임용12년차)

이렇게 승진이 "요원"해지다 보니 상공자원부 J사무관(임용13년차)처럼
푸념하는 소리도 나온다. "그래도 전엔 사무관생활 7년이면 "서기관대우"
딱지를 얻어 대외적으로는 서기관으로 불렸습니다.

뭔가 하는 일에도 "무게"가 실리는 것 같았죠. 그런데 작년부터 과장
보직이 없는 앉은뱅이 서기관제가 생기면서 고참사무관들은 오히려
서기관 호칭을 박탈당했죠. 뭐라고 불리는게 중요한건 아니지만
막상 사무관으로 다시 불리고 나니 서글퍼지더군요"

경제부처 사무관들의 과장승진연한은 평균12-15년. 공무원 인사적체가
어제오늘의 얘기도 아니고 비단 사무관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관료로 첫발을 내딛은 이들에게 출발부터 한 직급에서 10년이상
머물도록 하는 것은 처음에 품었던 정열이나 사명감마저도 바래게 하기에
충분하다.

승진이 늦다는 자체만이라면 새삼 문제될 것도 없다. "사무관"이란
자리의 위상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고,그런 "초라해져 가는"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게 과천사무관들의 진짜 고충이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짜내 보고서를 만들고 정책건의를 해도 위에서
정한 "방침"과 다르면 여지없이 헛수고가 된다는 것.

"야근을 밥먹듯하며 매일 자료수집하고 분석하고 보고서 만들면
뭐합니까. 뭐가 먹혀들어 가야죠.

일단 윗분들 선에서 정치적으로 결정이 나버리면 아무리 논리적으로
보고서를 만들어 설득하더라도 우이독경이지요.

차라리 위에서 결정된 방침에 따라 논리를 꿰어 맞추고 아무 생각없이
워드프로세서나 두드리는게 마음은 편합니다"(건설부 O사무관).

그렇다고 경제부처의 모든 사무관들이 아무런 권한도 없이 백의종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장급을 상대하며 한부처의 예산을 주물렀다 놨다
하는 예산실 사무관도 있다.

외청 사무관들은 과장보직을 맡아 한 조직을 경영해 보기도 한다. 신문
인사란에 사무관으론 유일하게 이름이 싣리는 국세청사무관도 "끗발"있는
사무관 리스트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처럼 목에 힘이라도 줄수 있는 사무관은 경제부처 전체
사무관중 1%도 안된다.

나머지 99%의 사무관들은 어제 그랬듯이 오늘도 정책아이디어를 짜내고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처리에 날새는 줄도 모르는 "일개미"들이다. 과연
이들의 어깨에 힘을 불어넣어 줄 묘안은 없을까.

"권한의 하부위양이 절실합니다. 현재의 관료조직에서 직급을 더 나눠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는 일은 똑같은데 서기관 명패만 달면
뭐합니까. 차라리 기존조직을 대폭 줄이고 상하조직체계는 다양화해
실무적인 권한이라도 아래로 내려야 합니다.

기업조직과 같이 부서 성격에 따라 팀제등을 운영할수도 있을 겁니다.
한마디로 관료조직도 리엔지니어링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상공자원부L사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