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브루크너 제5번 교향곡 연주에 청중으로 참여한 일은 작년에 했던 일 중에 손꼽히게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예술의전당에서 일을 하며 청중으로 함께했던 모든 공연 중 가장 큰 볼륨에 광포함마저 더해진 사운드를 들어본 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부터 그간 보아온 인상적인 여러 음악회와 음악가가 머릿속에 조용히 연상되어 오는 일, 그들이 상주하는 공간인 무지크페라인 건물 안에 자리한 유일한 흉상의 주인공인 클라라 슈만처럼 한국 태생의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단원을 보는 일, 다각적으로 예술의전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무대마루를 재단장한 뒤 저음 현악기들의 표현이 정말 풍부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해를 넘겨도 여전히 기분 좋은 생각들을 가져오는 그 음악회의 기억을, 시간예술인 음악처럼 시간의 이야기들로 정리해 보는 일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2019년 11월 1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으로부터
1980년대 언제인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연합고사라는 것이 끝났을 때였던가? 그 시절 존재했던 수학 단과 학원을 끊고 다니기 시작했다. 무수한 해를 지닌 부정과 해가 없는 불능의 앞머리 글자를 딴 ‘부불’이라는 이름의, 요즘 표현으로 일타 강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치동이 아닌 충정로 근처에 모여 있던 단과 학원들을 버스를 타고 다니며, 공부도 공부지만 언제나 워크맨과 이어폰을 귀에 꽂고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여러 클래식 음악을 듣고 다녔다. 카세트테이프가 닳아 해진다는 표현은, 아마도 그 카세트테이프를 청자가 험하게 다룬 까닭일 수도 있지만 이동 기기에서 발생하는 열 때문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했었나? 하지 않았었나?
카세트테이프가 늘어나 처음으로 이상한 음악을 듣게 된 것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빈번히 연주되지도 않으며 어쩌면 음악적으로도 여타 교향곡들에 비해 그 음악적 완성도가 뒤처지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겠지. 선율의 아름다움에 있어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슈베르트는 가곡의 분야에서 엄청난 성과를 이룬 작곡가이고, 당시 10대 중반의 한 소년에게 비록 교향곡이란 형식일지언정 음악의 아름다움을 선사한 일은 부정할 수 없겠다. 아마 그 시절은 음악이 지닌 선율의 매력에 가장 먼저 눈을 뜨는 과정을 겪고 있었던 일일 수도 있을 거라 정리해 본다. 필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예술의전당 음악당이 움트고 있었을 그 시간. 2019년 11월 1일을 보내며 다만 그런 가정을 해보는 일. 그 곡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아니라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8번이었다면, 2026년 지금의 모습은 어땠을까.
2019년 11월 1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으로부터 두 번째 <묵시적>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일은, <고딕적>에게도 동일하기를
어떤 연주자가 낭만주의 음악의 핵심은 죽음이기에 가끔 연주가 혹은 공부가 두려워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전혀 슬프지 않은 죽음일 수도 있고, 인간의 죽음 역시 아닐 수 있으며, 음악의 죽음일 수도 있고, 막바지에 다다른 끝이 보이는 어떤 음악 형식의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루크너 제8번 교향곡에 대해 자료들을 찾아보며 가장 맘에 들었던 이야기는 누구인가 부제처럼 붙여놓은 ‘Apocalyptic’이란 단어였다. 이 표현을 맞이한 순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처럼,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이 강렬한 장면을 담고 있는 영화인 <지옥의 묵시록>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쩜 그렇게 기가 막히게 영화의 이름을 지었을까! 이 영화의 원제가 <Apocalypse Now>. 브루크너 8번 교향곡 부제로 Apocalyptic이란 이름이 지금까지 생명을 얻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음악 역시 영화처럼 ‘종말’이라는 번역을 피해 ‘묵시록적인’이라는, 마치 구스타프 말러 제6번 교향곡의 부제 <비극적>처럼 혹은 그의 교향곡 제4번 <낭만적>처럼 살아왔으면 참 좋아했을 것 같다.
엄청 빠른 속도의 비브라토, 음을 몰아치는 격정적인 트레몰로의 화려한 연주가 어렵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금관악기들. 다만 굵직굵직한 움직임과 엄청난 볼륨으로 현악기들의 조력을 받아 마치 무대 뒤로부터 세상을 들어 밀고 나오는 듯한 그 묵직함의 매력은, 객석에 앉아 있으면 거대한 음들의 해일처럼 청자를 덮을 것이라고 무대 곁에 앉아 상상했다. 이 순간 역시 그 거대한 해일에 대한 느낌은 다양한 것일 수 있겠지. 교향곡의 주연으로서 사랑받아 본 역사가 없을 금관악기들의 반란으로서 현악기들의 음악을 전복시키는 개선장군의 모습일 수도 있겠고, 마치 권투선수의 무수한 잽들처럼 같은 내용을 비슷하게 반복해 옴으로써 청중들에게 느껴진 같은 것들에 대한 지루함을 단번에 일소하는 극도의 청량감일 수도 있겠다. 혹은 단순하지만 언제나 심오한 의미를 지녔다는 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음악으로 표현하는 한 줄기 빛일 수도 있겠다. 아마도 그래서 ‘종말’이라는 결정적인 단어보다는 ‘묵시’라는 간접적 또는 더욱 은유적이며 관조적일 수 있는 이 표현이 맘에 들었나 보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마에스트로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함께할 다음 브루크너 교향곡의 번호가 몇 번일지 모르겠지만, 그 공연이 성사되기 전까지 브루크너 제5번 교향곡에 붙은 부제에 관한 생각과 상상 역시 풍부해져 있기를. 그것이 ‘고딕적’이건, ‘중세적’이건, ‘파우스트적’이건 간에.
(1분 21초에서 1분 22초 – 베토벤 그리고 브루크너가 잘 가르쳐준 음악적 전환의 순간)
2023년 11월 11일 롯데콘서트홀 RCO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으로부터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층 A블록 중간쯤 앉았던 브루크너 제5번 교향곡 연주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콘트라베이스의 소리였다. 음악회를 현장에서 경험하는 매력적인 일 중 하나는 음향기기의 청취를 통해서는 확인하기 어려웠던 작지만 위대한 순간을 시각적인 도움을 받아 마음과 머리에 담아놓을 수 있는 일이고, 이 공감각적인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렬하다는 생각이 든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의 트럼펫 스타카토를 육안으로 확인하며 받은 충격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브루크너 교향곡 제5번 속 콘트라베이스의 크레센도를 충만히 느끼는 충실한 가이드 역할을 해주었다.
공연을 본 후 남겼던 기록 두 개를 잠시 꺼내어본다.
① 콘트라베이스의 크레센도를 목격하는 그 경험에 앞선
“트럼펫 스타카토 지시가 있건 없건 간에. 그걸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 머릿속에 숫자로 이루어진 그 흔한 욕이 바로 떠올랐다. 음악을 듣는 게으름에 대한 것일 수도, 끝이 없는 음악의 아름다움에 대해 유한한 청자가 매일매일 깨닫는 기쁨일 수도.”
② 음악회가 청중을 전이하는 그 아름다운 순간
“사방의 문이 닫히는 순간 가두리되어진 청중들의 몸과 마음을 현실과 유리시켜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 것이 좋은 음악과 연주가 할 수 있는 역할이기도 할 테다. 파이프 오르간의 얼굴을 지니고 오케스트라라는 사지를 지닌 괴물이 자신이 지닌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다른 세상에 다녀오는 일이 이 공연에서는 군더더기 없이 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예술의전당은 법인이다. 법을 기반으로 한 인격체이니 성장과 발전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생각일 테다. 한 세대의 시간을 넘어 불혹의 나이를 앞둔 지금까지 어떤 것들이 변해왔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가장 먼저는 2005년 레노베이션을 통해 콘크리트의 민낯 바닥을 드러냈던 객석이 떠오른다. 새롭게 단장한 객석은 콘서트홀의 음향 발전을 위해 어떤 기여를 오늘까지 해 온 것일까. 약 십 년 전부터 시작된 음악회 공간의 습도를 조절하려는 노력은 성악가들에게 혹은 기악 연주자들에게 어떤 편안함과 힘듦을 주었을까. 2023년, 객석에 이어 뒤집은 콘서트홀 무대와 마루는 음악회의 완성된 표현을 위해 무슨 도움을 주고 있을까. 예술의전당을 사랑하는 청중, 유명한 조율사, 이 시대 아마 가장 바쁠 톤 마이스터의 이야기를 조금씩 꾸며서 삽입해 본다.
“마에스트로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선 포디엄 말입니다. 특정 부분을 밟으면 소음이 들립니다. 저는 한 해에 300일 정도 이곳에서 음악회를 보는데, 11월 20일 공연에서도 작은 소음이긴 합니다만 어서 빨리 소음이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씀드립니다.”
“톱밥과 아교가 뒤섞인 필러, 소음을 잡기 위해 박아놓은 피스(나사)들, 밟으면 삐걱거리는 무대마루 구석구석. 무대마루를 새롭게 바꾼다는 것은 아마 그런 의미일 거야. 콘서트홀 무대마루 전체가 흠결 없는 단 하나의 음향판이 된 거지. 금이 간 콘서트그랜드 피아노의 음향판을 완벽히 교체한 거라면 적당한 비유가 되려나.”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서 연주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정말 아름답지요. 예술의전당도 무대마루를 개선한 후에 전체적으로 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기는 합니다. 어떤 난이도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객석 각 열 사이 타일 비슷한 것들이 나무로 대체되어 진다면 사운드에 있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2006년 4월 8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의 첫 내한 공연을 성사시켰던 기획사로부터 십 년도 넘은 2017년에 연락이 왔다.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라이브 연주 중 음반에 담고 싶은 곡들을 찾고 있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녹음도 그중 하나여서 혹시 음원을 지니고 있는지를 문의해 왔다고 했다. 『EVGENY KISSIN · BEETHOVEN』이라는 이름으로 최종 출시된 이 음반에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3번 연주가 첫 작품으로 수록되어 있고, 베뉴는 SEOUL ARTS CENTER임 역시 소개되어 있다. 제26번 <고별> 역시 앨범에 포함되어 있는데, 라이브 연주의 장소는 Musikverein, Vienna City.
빈의 무지크페라인은 1870년 개관 후 지금까지 156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단 연도는 1842년이며 지금까지 184년. 12년 후인 2038년이면 예술의전당 음악당은 50주년을 맞는다. 빈의 무지크페라인은 문을 열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황금 사운드’란 기분 좋은 부제를 지니게 되었을까? 6년 간격에 브루크너 교향곡 하나씩이라면 기껏해야 두 곡일 뿐인데, 혹시 음악회의 이치를 깨닫고 주관을 지니게 되었으며 하여 세상사에 미혹되지 않을 2028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 마에스트로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연주의 베뉴가 된다면 그리고 실황 녹음이 곁들여진다면 어떨까? 이미 2025년 11월 20일 그 이야기를 귀띔받았던 것임을 요즘 표현으로 이불킥을 하며 깨닫게 되지 않으려나? 그 후 예술의전당 음악당의 삶은, 무지크페라인의 신년음악회를 장식하는 꽃들처럼, 우주의 기운으로 가득한 꽃길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고운 꿈을 품어 본다. 느즈막한 신년의 희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