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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지앵들은 여전히 유리창을 핥는다…쇼윈도의 어떤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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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e] 김인애의 Art de Vivre

    쇼윈도의 욕망이 예술의 창으로 변화
    유리벽으로 도시와 전시의 경계를 허물다
    200년 전, 파리지앵들의 욕망에 이름이 붙었다. ‘레슈 비트린(Lèche-vitrine)’, 쇼윈도 구경을 뜻하는 이 프랑스어 단어를 직역하면 ‘유리창을 핥는다’는 뜻이다. 갖고 싶은 물건을 바라보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뜨거웠으면 이런 표현이 생겼을까. 백화점의 탄생과 함께 만들어진 이 단어에는 오랫동안 욕망과 소유 사이의 간극이 담겨 있었다.
    유리창을 핥는 시선들. ‘레슈 비트린’이 시작된 시절 파리의 풍경 / 그림출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국립대학도서관 Gallica (Lolo Schott 作)
    유리창을 핥는 시선들. ‘레슈 비트린’이 시작된 시절 파리의 풍경 / 그림출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국립대학도서관 Gallica (Lolo Schott 作)
    2026년 파리의 유리창은 더 이상 욕망만을 자극하지 않는다. 봉 마르셰 백화점은 상품을 치운 쇼윈도에 예술을 채우고, 까르띠에 재단은 미술관의 벽을 쇼윈도처럼 투명하게 개방했다. 상업 공간이 미술관의 옷을 입고, 예술 기관이 백화점의 소통 방식을 빌려온 것이다. 유리라는 매개를 사이에 두고 도시의 산책자들에게 무상으로 예술을 건네는 변화, 그 배경에는 기업의 문화 후원과 이를 뒷받침한 정책이 있다.
    참여형 설치작품으로 쇼윈도를 변형시킨 중국 송동(Song Dong) 작가의 전시 전경 / 사진제공. Le Bon Marché Rive Gauche
    참여형 설치작품으로 쇼윈도를 변형시킨 중국 송동(Song Dong) 작가의 전시 전경 / 사진제공. Le Bon Marché Rive Gauche
    봉 마르셰, 기억을 전시하다

    파리 최초의 백화점 봉 마르셰는 매년 1월, 쇼윈도와 내부 공간을 현대 미술 작가에게 내어준다. 카르트 블랑슈(Carte Blanche), 쇼윈도와 매장을 마음껏 쓰라는 백지 위임이다. 올해 초대받은 중국 작가 송동(Song Dong)은 쇼윈도를 비우고 그 자리를 고객과 직원들이 직접 빌려준 낡은 보온병, 구형 전자기기, 손때 묻은 사물들로 채웠다.
    봉 마르셰 백화점 아티스트 초대전에 11번째로 초대된 송동(Song Dong) 작가 / 사진제공. Le Bon Marché Rive Gauche
    봉 마르셰 백화점 아티스트 초대전에 11번째로 초대된 송동(Song Dong) 작가 / 사진제공. Le Bon Marché Rive Gauche
    봉 마르셰 백화점 2층에 전시중인 송동(Song Dong) 작가의 몰입형 설치 작품 / 사진제공. Le Bon Marché Rive Gauche
    봉 마르셰 백화점 2층에 전시중인 송동(Song Dong) 작가의 몰입형 설치 작품 / 사진제공. Le Bon Marché Rive Gauche
    전시 제목 <다채롭고 다양한 사물들 - 百貨(백화)>는 백화점이 본래 수많은 물건이 모인 곳이라는 기원을 되새긴다. 과거 파리를 산책하던 이들이 유리창 너머의 가격표를 핥으며 소유를 꿈꿨다면, 지금은 그 자리에 놓인 누군가의 삶과 기억을 마주한다. 작가는 이를 사물의 ‘두 번째 삶’이라 부른다. 새것을 팔아 소유를 부추기는 백화점에서, 송동은 시간이 쌓인 물건을 통해 ‘소유 이후의 삶’을 보여준다. 작가의 말대로 물건을 파는 백화점의 목적과 정반대되는 작업이다.

    쇼윈도 앞에서 지갑 대신 시선이 열린다. 스마트폰 화면 속 매끄러운 이미지에 길들여진 눈이 세월의 흔적을 천천히 더듬으며, 물건이 가진 세월의 질감을 마주한다. 소비를 유혹하던 유리창은 이제 대화를 건네는 통로가 됐다.
    봉 마르셰 백화점 대로변 쇼윈도. 낡은 창틀을 나타낸 사각 프레임을 들여다보면 거울에 비친 물건들이 보인다 / 사진제공. Le Bon Marché Rive Gauche
    봉 마르셰 백화점 대로변 쇼윈도. 낡은 창틀을 나타낸 사각 프레임을 들여다보면 거울에 비친 물건들이 보인다 / 사진제공. Le Bon Marché Rive Gauche
    상품을 치운 자리를 채운 직원과 고객들의 낡은 사물들 / 사진제공. Le Bon Marché Rive Gauche
    상품을 치운 자리를 채운 직원과 고객들의 낡은 사물들 / 사진제공. Le Bon Marché Rive Gauche
    까르띠에 재단, 경계를 지우다

    봉 마르셰가 쇼윈도에 상품 대신 예술을 채운다면, 까르띠에 재단은 건물 안과 밖의 경계를 지웠다. 까르띠에 재단은 명품 브랜드의 매장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현대미술 기관이다. 흥미로운 건 재단이 새로 둥지를 튼 곳이 1855년 문을 열어 파리 쇼핑 문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루브르 백화점 자리라는 점이다.
    The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2 Place du Palais-Royal, Paris. © Jean Nouvel  ADAGP, Paris, 2025. / 사진. © Martin Argyroglo
    The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2 Place du Palais-Royal, Paris. © Jean Nouvel ADAGP, Paris, 2025. / 사진. © Martin Argyroglo
    건축가 장 누벨은 이 부지의 내력을 살렸다. 7미터 높이의 거대한 유리창을 달아 안이 밖에서 훤히 보이게 했다. 백화점 쇼윈도처럼. 길을 걷던 시민이 발걸음을 멈추고 유리 너머 작품을 들여다본다. 개관 전시 제목도 같은 맥락이다. 19세기 루브르 백화점이 신제품을 모아 선보이던 행사명 '종합 전시(Exposition Générale)'를 그대로 가져왔다. 당시 한 저널리스트는 '우리는 박물관에 가듯 백화점에 간다'고 썼다. 지금은 그 반대다. 소비의 공간이었던 자리에서 지나가는 누구나 무상으로 예술을 마주한다.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2025. / 사진. © Marc Domage.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2025. / 사진. © Marc Domage.
    자본과 예술 사이

    물론 기업들의 이런 행보를 곱게 보는 시선만 있는 건 아니다. ‘아트워싱(Artwashing)’이라는 말도 나온다. 럭셔리 그룹이라는 거대 자본이 예술을 이용해 기업의 상업적 의도를 가린다는 뜻이다. 예술의 다양성이 자본의 취향대로 획일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따른다. 기업 재단이 커질수록 공공 미술관의 역할이 줄어들고, ‘예술의 사유화’가 빨라진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거대 자본이 문화의 주도권을 쥐면, 예술은 기업의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쇼윈도에는 입장료가 없다. 미술관 문턱을 부담스러워하던 이들도 유리창 앞에서 예술을 마주한다. 자본의 의도가 무엇이든,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다. 루이 14세 이래 국가가 독점하던 문화 주도권이 민간으로 넘어가고 있다. 파리의 유리창은 그 변화를 비춘다.

    아야공 법, 판을 바꾸다

    이런 변화의 뿌리에는 2003년 제정된 '아야공 법(Loi Aillagon)'이 있다. 기업이 문화예술에 투자하면 연 매출액의 0.5% 한도 내에서 투자액의 60%를 법인세에서 감면해 준다. 메세나(기업의 문화후원)는 이 법 이후 기부를 넘어 기업 전략이 됐다. 일방적 후원에서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이미지 관리 수단에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효과는 숫자로 드러난다. 프랑스 기업 메세나 협회에 따르면, 법 시행 직후인 2004년 약 10억 유로였던 기업 후원 규모는 2023년 38억 유로를 넘었다. 20년 만에 약 4배가 된 것이다. 현재 17만 개 이상의 기업이 메세나에 참여한다. 루브르 박물관은 연간 약 1,200만 유로, 베르사유 궁전은 1,000만 유로를 기업 후원으로 받는다.
    Le Bon Marché Rive Gauche에서 열린 중국 송동(Song Dong) 작가의 전시 전경 / 사진제공. Le Bon Marché Rive Gauche
    Le Bon Marché Rive Gauche에서 열린 중국 송동(Song Dong) 작가의 전시 전경 / 사진제공. Le Bon Marché Rive Gauche
    이 법은 돈만 기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공간이나 기술을 내놓는 현물 메세나도 제도권 안에 들어왔다. 봉 마르셰가 손님으로 붐비는 세일 기간에 쇼윈도를 작가에게 내어주는 것은 법적으로 고부가가치 공간의 기여로 인정된다. 기업은 세제 혜택을 받고 브랜드는 예술과 나란히 서게 된다. 유리창을 시민에게 여는 건 기업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인센티브를 붙인 건 정책이다.

    유리창, 욕망에서 호기심으로

    유리창의 역할이 확장됐다. 무엇을 팔 것인가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로. 파리 최초의 백화점은 쇼윈도를 비우고 낡은 사물들을 들여놓았다. 한때 소비의 성지였던 루브르 백화점 자리는 유리벽을 연 현대미술 기관이 차지했다. 방식은 달라도 방향은 같다. 유리라는 투명한 경계를 사이에 두고 도시의 일상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을 넓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 흐름을 따라 파리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Building site view of the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s future premises, Place duPalais-Royal, Paris, March 2025. / 사진. © Martin Argyroglo
    Building site view of the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s future premises, Place duPalais-Royal, Paris, March 2025. / 사진. © Martin Argyroglo
    파리지앵들은 여전히 유리창을 핥는다. 욕망을 비추던 유리창이 이제는 도시와 대화한다. 바쁜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잠시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지나가는 이들은 사물이 품은 기억을 들여다보고, 투명한 벽을 통해 타인의 세계를 마주한다. 욕망과 소유 사이의 간극에 호기심이라는 틈이 생겼다. 200년 된 레슈 비트린이 진화하는 중이다.

    파리=김인애 럭셔리&컬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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