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산호목걸이를 걸친 누드>, 1917년. 모딜리아니의 1917년 개인전에 전시되었던 많은 누드화 중 하나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 그림출처. 오벌린대학 알렌 기념 미술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산호목걸이를 걸친 누드>, 1917년. 모딜리아니의 1917년 개인전에 전시되었던 많은 누드화 중 하나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 그림출처. 오벌린대학 알렌 기념 미술관
1917년 12월 3일, 파리의 겨울 공기는 매서웠지만 뤼 테부(Rue Taitbout) 거리에는 묘한 열기가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오페라 지구(Opera District) 인근으로, 갤러리와 예술 관련 시설들이 모여 있는 문화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중에서도 베르트 와이유 갤러리(Galerie Berthe Weill)는 파리에서도 드문 공간이었습니다. 아직 인정받지 못한 무명 예술가들에게도 기꺼이 전시 기회를 열어준 곳이었으니까요. 이날 이곳에서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adeo Modigliani, 1884~1920)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첫 개인전이 막 개막한 참이었습니다.

붐비는 번화가를 지나던 행인들은 갤러리 앞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이색적인 누드화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 중에는 모딜리아니가 전시를 위해서 같은 해 그린 <산호 목걸이를 걸친 누드>도 걸려 있었지요. 캔버스 속 갈색머리를 한 여인은 자신의 풍만한 몸을 드러낸 채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다리를 살짝 벌린 채,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 모습으로 윙크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손으로 살짝 가려진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은밀히 드러난 털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전시가 열린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 소박하게 표현된 털 때문에 소동이 벌어지게 됩니다. 갤러리 입구에는 ‘그곳의 털이 보이는 여자 그림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성난 군중들이 점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는 그림을 보고 음흉하게 웃었고, 일부는 냉소적이었으며, 몇몇은 놀란 듯 성호(聖號, 십자가 모양)를 긋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경찰관들이 신고를 받고 도착했답니다. 분노한 인파 속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경찰은 갤러리에 들어와 창 밖에서 보이는 모든 누드화를 철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여성, 아이들, 그리고 점잖은 신사들이 활보하는 거리에 이런 불온한 그림이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유였지요. 경찰과 행인들이 모딜리아니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것은 뿜어져 나오는 고상함이 아닌, 그저 작은 ‘삼각형’에서 흘러나오는 저속함뿐이었죠. 당시 파리 사회에서 여성의 나체 자체는 이미 낯선 주제가 아니었지만, 음모가 도드라진 모습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서른세 살의 모딜리아니, 그의 인생 첫 개인전은 이렇게 시작부터 삐걱거렸습니다. 평생 준비해 온 데뷔 무대가 선정성으로 세간의 화제를 일으키다니… 그는 타 들어가는 분노를 억눌러가며 자신의 작품이야말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예술’이라고 강력히 항변했지만, 그의 변호는 끝내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결국 경찰관들의 조치는 전시 중단으로 이어지고 그의 누드화들은 보이지 않는 갤러리 뒤편으로 옮겨집니다. 비록 갤러리 전시는 예정보다 일찍 문을 닫았지만, 모딜리아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예술계에 확고히 하게 됩니다. 게다가 그날 그림도 두 점 정도 팔아 앞으로 며칠 동안은 끼니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죠. 하지만 왜일까요?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씁쓸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혼신을 다해 그린 여성들이 고작 털 때문에 천박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사실이, 깊고도 무거운 응어리처럼 남았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낸 이단아

소란으로 막을 내린 1917년 모딜리아니의 개인전은 그가 살아 생전에 연 유일한 전시이자, 동시에 마지막 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부터 갤러리는 정상 운영을 재개했지만, 전면 유리창을 통해 가장 잘 보이던 누드화들은 이미 모두 치워진 후였지요. 모딜리아니 예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누드화들이 빠진 전시는 이미 생명력과 의미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의 누드화 속 여성들은 다른 화가들의 것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길게 늘어진 목과 얼굴, 부드럽게 흐르는 곡선, 살짝 기울어진 자세 속에서도 은밀하고 관능적인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가끔씩 투명하게 처리된 눈빛은 관람자를 직시하면서도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해서, 그 애매한 표정에는 단순한 유혹을 넘어선 인간적인 깊이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딜리아니는 어떻게 이런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낸 걸까요?

모딜리아니는 1884년, 이탈리아 서부해안의 항구도시 리보르노의 유서 깊은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한때 부유했던 집안은 그의 탄생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파산 위기에 처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의 탄생이 가족의 재산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었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는 임산부나 갓난아기를 둔 산모의 침대는 채권자가 압류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어머니가 진통을 겪고 출산을 하던 그 순간, 집행관들이 집안으로 들이닥친 것인데요. 가족들은 집안의 가장 귀중한 물건들을 서둘러 산모의 침대 위에 쌓아 올려 재산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족을 위기로부터 구원한 모딜리아니의 비범한 출생과는 달리, 그는 어린 시절부터 늘 병약했습니다. 열한 살 때 앓은 늑막염을 시작으로 장티푸스와 폐결핵까지 차례로 겪으며 목숨을 잃을 뻔한 경험을 여러 번 하게 됩니다. 이런 잦은 병마와의 싸움은 일찍부터 내세와 내면에 깃든 영혼에 관한 깊은 관심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모딜리아니는 특히 어머니 외제니 가르생(Eugénie Garsin, 1855~1927)과 깊은 유대감을 나누었는데요, 아들의 예술적 감수성을 늘 격려하던 어머니는 그를 열 살까지 집에서 직접 가르치며, ‘이 아이는 예술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주변에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병세가 호전된 모딜리아니는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예술적 안목을 키우게 되는데요. 나폴리, 카프리, 로마, 아말피를 거쳐 피렌체와 베네치아까지 이어진 여정에서 그는 르네상스의 유산과 고전 조각, 그리고 이탈리아 특유의 빛과 색채를 직접 마주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평생 탐구하게 될 ‘고전적 아름다움과 현대적 표현의 융합’이라는 예술적 성향을 결정짓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1906년, 그는 마침내 파리로 건너가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 일대의 보헤미안 예술가 무리에 합류했습니다. 파리에서 모딜리아니는 처음에는 고상한 예술가의 이미지를 유지하려 했으나, 곧 압생트와 마약에 손을 대고 창녀촌을 드나드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습니다. 사치스러운 소비로 금세 돈을 탕진했고, 건강마저 악화되었지만 작업에 대한 열정만큼은 결코 식지 않았습니다. 여러 전위적인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그는 점차 이탈리아에서 배운 고전 아카데미 회화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했고, 기존에 몸에 밴 기법과 규범을 과감히 내려놓으며 자신만의 화풍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흐름이었지만, 모딜리아니에게 그것은 스스로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 1876~1957) 등과 교류하며 강한 예술적 자극을 받았습니다. 특히 조각을 바라보는 브랑쿠시의 시각과, 이집트·그리스·아프리카 부족 예술을 연상시키는 브랑쿠시 작품의 직관적이며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는 모딜리아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콘스탄틴 브랑쿠시, <키스>, 1907~08년, 모딜리아니는 브랑쿠시로부터 형태의 순수성, 인체를 그 본질로 응축해내는 방법을 배운다. / 사진출처. 미국 의회도서관
콘스탄틴 브랑쿠시, <키스>, 1907~08년, 모딜리아니는 브랑쿠시로부터 형태의 순수성, 인체를 그 본질로 응축해내는 방법을 배운다. / 사진출처. 미국 의회도서관
1909년 브랑쿠시와의 만남 이후, 모딜리아니는 자신이 ‘진정한 소명’이라 여겼던 조각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먼저 약 20여 점의 석조 두상 제작에 착수했는데, 이 작업은 고대 이베리아와 아프리카 부족 조각, 그리고 캄보디아·이집트 조각의 간결하고 상징적인 얼굴 구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의 두상은 길게 늘어난 타원형 얼굴, 깊이 패인 눈두덩, 단순화된 코와 입, 그리고 표정을 지운 듯한 고요함이 특징입니다. 이는 당대 유럽 전위미술가들이 추구했던 ‘원시성’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모딜리아니 특유의 우아함과 장식성이 함께 깃든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형성했습니다. 그는 종종 작업이 끝난 두상들을 마당에 줄지어 세워두고, 저녁이면 물을 뿌리며 오랫동안 바라보았다고 전해집니다. 때로는 촛불을 켜서 원시 신전의 제의(祭儀)처럼 연출하기도 했는데, 이는 두상을 단순한 조형물이 아닌, 영적인 존재로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두상 연작’은 훗날 ‘카리아티드(Caryatid, 건축 기둥을 대신해 여성 인체를 형상화한 조각)’ 구상으로 확장되었으며, 인체와 건축 구조물을 결합한 비범한 형태를 찾는 그의 조형적 시도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좌] 바우레족 예술가, <코트디부아르 그바그바 마을의 므블로 공연용 초상 가면>, 1900년경  [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여성 두상>, 1912년. 모딜리아니는 서아프리카 부족의 춤과 의식용 가면에서 자신의 여성 두상의 형태를 발견했다. / 사진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좌] 바우레족 예술가, <코트디부아르 그바그바 마을의 므블로 공연용 초상 가면>, 1900년경 [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여성 두상>, 1912년. 모딜리아니는 서아프리카 부족의 춤과 의식용 가면에서 자신의 여성 두상의 형태를 발견했다. / 사진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의 조각 작업들은 파리의 전위적인 작가들을 매년 소개했던 살롱 도톤(Salon d’Automne)의 1912년 단체 전시에 공개되었으며, 평단으로부터 조각가로서의 인정 또한 받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직접 조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돌가루가 폐를 악화시켜 기침과 실신을 불러왔고, 무거운 석재를 옮겨야 하는 물리적 부담, 작업 공간의 부족,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인한 재료난, 그리고 그의 회화를 더 선호하는 미술 시장의 분위기가 겹쳤습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그는 심지어 몽파르나스 건설현장에서 남은 석재를 훔쳐와 작업하기도 했으나, 결국 1914년 무렵부터 조각을 완전히 포기하고 회화에 다시 전념하게 됩니다.
살롱 도톤(Salon d’Automne)의 1912년 단체 전시장 내부 사진, 1912년. 당시에 전위적이었던 입체파(Cubist)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된 모딜리아니의 ‘두상 연작’ 조각 4개가 보인다.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살롱 도톤(Salon d’Automne)의 1912년 단체 전시장 내부 사진, 1912년. 당시에 전위적이었던 입체파(Cubist)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된 모딜리아니의 ‘두상 연작’ 조각 4개가 보인다.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비록 조각의 꿈을 접었지만, 모딜리아니의 회화에는 여전히 조각가의 시선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의 누드화는 마치 돌에서 살을 깎아낸 듯 길고 단순화된 형태, 부드럽게 이어지는 곡선, 그리고 불필요한 요소가 제거된 순수한 인체의 본질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는 끝내 ‘대리석으로 모든 것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실현하지 못했지만, 조각에 대한 그의 열망과 카리아티드에 표현된 이상은 평생 그의 작업을 지탱하는 조형적 뿌리가 되었습니다.
[좌] 알카메네스, <카리아티드>의 뒷모습,기원전 40-15년경 / 사진출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핑크 누드 - 카리아티드>, 1914-15년경 / 그림출처. 반스재단.  모딜리아니의 단순한 조각 속 장식적인 머리 형태는, 그가 고대 그리스 <카리아티드> 두상에 화려하게 꾸며진 모양을 보고 영감을 얻었음을 보여준다.
[좌] 알카메네스, <카리아티드>의 뒷모습,기원전 40-15년경 / 사진출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핑크 누드 - 카리아티드>, 1914-15년경 / 그림출처. 반스재단. 모딜리아니의 단순한 조각 속 장식적인 머리 형태는, 그가 고대 그리스 <카리아티드> 두상에 화려하게 꾸며진 모양을 보고 영감을 얻었음을 보여준다.
길쭉한 나체를 탄생시키다: 즈보로프스키의 누드화 연작

1916년부터 1919년 사이,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상징적인 누드화들을 탄생시킵니다. 이는 비스듬히 눕거나 앉아있는 여성들을 그린 열정적인 연작으로, 뜨거운 열기와 폐쇄된 공간 속 짙은 친밀감을 머금고 있습니다. 이 연작은 일찍이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 폴란드 출신 미술상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Léopold Zborowski, 1889~1932)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안정적으로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즈보로프스키는 그의 전속 판매원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되기로 한 것인데요. 그에게 작업실, 재료, 그리고 하루 15프랑(현재 가치로 약 10만원 추정)의 일당을 제공했습니다. 더구나, 모딜리아니가 모델을 구하기 어려워할 때면, 그는 기꺼이 자신의 아내 안나 즈보로프스카(Hanka Zborowska, 1885~1978)를 그릴 수 있도록 배려하며, 오후에는 자택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답니다. 이 실용적이면서도 결정적인 지원 덕분에, 모딜리아니는 경제적 불안에서 잠시 벗어나 조각적 원칙에 기반한 이색적인 ‘즈보로프스키 누드화 연작’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 1919년  [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의자에 기댄 항카(안나) 즈보로프스카 부인>, 1919년. 이 작품들 외에도 모딜리아니는 자신을 아낌없이 지원해준 즈보로프스키 부부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여러 차례 그들을 모델로 앉혀 화폭에 담았다. / 그림출처. 반스재단
[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 1919년 [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의자에 기댄 항카(안나) 즈보로프스카 부인>, 1919년. 이 작품들 외에도 모딜리아니는 자신을 아낌없이 지원해준 즈보로프스키 부부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여러 차례 그들을 모델로 앉혀 화폭에 담았다. / 그림출처. 반스재단
모딜리아니가 누드를 그린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즈보로프스키의 후원 아래 작품의 규모, 대담함, 그리고 순수한 관능성이 폭발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두꺼운 붓질, 조각 같은 질감, 그리고 최소한의 배경으로 구성된 모딜리아니의 기법은 오롯이 인물의 몸에 모든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연작 속 여성들은 대부분 즈보로프스키가 고용한 전문 모델들이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죠. 그럼에도 그는 그녀들을 차갑게 거리를 두고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붓은 엉덩이의 곡선과 몸매의 부드러움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더듬었고,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육체성을 포착했습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누드(Nu couché)>, 1917-18년 / 그림출처. 용 미술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누드(Nu couché)>, 1917-18년 / 그림출처. 용 미술관
모딜리아니의 <누워있는 누드 (Nu couché)>는 그의 누드 연작 중에서도 가장 개방적인 자세를 취한 작품입니다. 모델은 두 팔과 두 다리를 모두 벌리고 누워있어, 시선과 신체가 동시에 관람자를 향해 완전히 열려 있습니다. 눈은 거의 검정색에 가까운 회색으로 칠해져 실제로 관객을 응시하는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그 불투명함이 오히려 강한 존재감을 부여합니다. 이 대담한 구도는 단순한 에로티시즘을 넘어, 작가의 내면과 시대적 맥락을 읽게 합니다. 일부 해석에 따르면, 병약한 몸으로 징집조차 거부당한 그는 전쟁 속에서 느낀 소외와 결핍을 보상하듯 더욱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누드를 그렸다고 합니다. 물감은 두텁게 올려져 마치 조각을 깎듯 신체를 빚어내며, 선명한 색채와 붉은 색이 지배하는 배경은 화면을 강렬하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조형과 회화를 넘나드는 걸작입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침대의자에 앉아있는 누드(아름다운 로마 아가씨)>, 1917년, 개인 컬렉션 소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침대의자에 앉아있는 누드(아름다운 로마 아가씨)>, 1917년, 개인 컬렉션 소장
<아름다운 로마 아가씨>로 잘 알려진 모딜리아니의 <침대의자에 앉아있는 누드>는 ‘즈보로프스키 누드화 연작’ 중에서도 특히 강렬하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입니다. 여성은 붉은색 배경 앞, 침대의자에 다리를 꼰 채 앉아, 흰 시트로 몸의 일부만을 살짝 가리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고요하고 자존감이 느껴지는 자세지만, 무심한 듯 드러난 신체와 관람자를 향한 은근한 시선이 묘한 긴장감을 만듭니다. 두터운 붓질과 깊이 있는 색채가 피부에 온기와 무게를 더해, 마치 관람자가 바로 앞에서 그녀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감각을 줍니다. 놀랍게도 다른 모딜리아니의 누드화와는 다르게, 이 작품은 완성이 되자마자 즈보로프스키의 손을 거쳐 한 수집가에게 판매됩니다. 이는 모딜리아니의 작품이 생전에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는 '오명'이 완전히 거짓임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즈보로프스키와의 긴밀한 협업으로 완성된 이 누드화 연작은, 그의 누드가 파리 예술계에서 얼마나 큰 관심을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충분한 가능성을 지녔었는지를 증명하니까요. <침대의자에 앉아있는 누드>를 작업하던 중, 즈보로프스키가 예고도 없이 작업실을 찾아오자, 모딜리아니가 격분하여 모델을 내보내고 캔버스를 부수겠다고 위협한 일화는 그가 얼마나 이 작품에 열정과 정성을 쏟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파란 쿠션위에 누워있는 누드>, 1916년, 개인 컬렉션 소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파란 쿠션위에 누워있는 누드>, 1916년, 개인 컬렉션 소장
조르지오 바바렐리, 티치아노 베첼리오<잠자는 비너스>, 1508-10년경 / 그림출처.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
조르지오 바바렐리, 티치아노 베첼리오<잠자는 비너스>, 1508-10년경 / 그림출처.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
모딜리아니의 <파란 쿠션위에 누워있는 누드>는 얼핏 보면 별다른 서사가 없는 단순한 누드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누워있는 자태가 16세기 초 조르지오 바바렐리(Giorgio Barbarelli, c. 1508 – c. 1510, 이하 조르조네)와 티치아노가 그린 <잠자는 비너스>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고전적 비너스의 대각선 구도를 거의 그대로 따르면서도, 모딜리아니는 그 매끈하고 이상화된 육체를 조각처럼 반질반질한 질감과 거친 색채로 바꿔 놓습니다. 르네상스의 이상미를 근대 회화의 언어로 옮긴 셈이며, 이는 단순한 차용이 아니라, 과거 거장의 명화에 대한 찬사를 보냄과 동시에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을 한 것입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누드(왼쪽으로)>, 1917년, 개인 컬렉션 소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누드(왼쪽으로)>, 1917년, 개인 컬렉션 소장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그랑 오달리스크>, 1814년 / 그림출처. 루브르 박물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그랑 오달리스크>, 1814년 / 그림출처. 루브르 박물관
반면 <누워있는 누드(왼쪽으로)>는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살면서 그린 가장 큰 그림이며, 가로로 된 구도 속 여성의 전신을 모두 화면에 담은 유일한 작품입니다. 특히, 그가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발까지 등장하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입니다. 모딜리아니가 평소 발을 그리기를 꺼려 했으며 이에 자신이 없었다는 일부의 추측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예외적으로 과감한 묘사를 했습니다. 여성이 누워있는 방식과 구도는 앵그르의 대표작인 <그랑 오달리스크>와 거의 일치합니다. 1814년 앵그르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여동생이자 나폴리 왕국의 왕비였던 카롤린 뮈라(Caroline Murat, 1782~1839)의 의뢰로 제작한 작품인데요, 지나치게 긴 허리와 늘어진 곡선 때문에 해부학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오달리스크 양식의 관능미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모딜리아니는 이 고전적인 자태를 빌리되, 앵그르의 흠 없는 매끈한 선과 흔적 없는 붓질 대신 자신만의 조각 같은 덩어리감과 풍부한 살색으로 편집하여 자신만의 현대적인 취향으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이 두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단순히 과거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의 유산을 자신의 회화 속에 불러와, 20세기적 감각과 인간적인 온기를 불어넣은 사례입니다. 그는 전통에 기대면서도 그것을 새롭게 쓰는 방법을 알았고, 그 과정에서 과거의 명화들은 그에게 하나의 경의의 대상이자, 동시에 재조립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불과 3년 사이, 그는 30점이 넘는 탁월한 누드화를 완성했고, 이 작품들은 모딜리아니가 조각적이고 입체적인 인간의 신체를 평평한 회화 속으로 완벽하게 단순화하고 정제한 대표적인 성취로 평가됩니다. 그는 불필요한 세부적인 요소들을 덜어내면서도 형태의 본질과 따뜻한 감성을 고스란히 남겨, 오늘날까지도 그의 예술 세계를 상징하는 강렬한 유산으로 남게 된답니다.

모딜리아니 소녀와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

모딜리아니가 초상화 속 인물의 눈을 비워둔 것은 단지 자신의 그림이 조금 더 특색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부린 기교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지병을 안고 살았던 병약한 그에게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가득했습니다. 흔히 ‘눈은 영혼을 들여다보는 창’이라고 말합니다. 동일한 선상에서, 지인들이 왜 인물의 눈을 잘 그리지 않느냐고 묻자 모딜리아니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영혼을 들여다 봤을 때, 저는 비로소 당신의 눈을 그릴 것입니다.”

모딜리아니에게 눈이라는 것은, 그저 성의 없이 채워 넣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나 봅니다. 오직 대상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눈으로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었을 때만 그 신성한 영역을 화폭 위에 완성했던 것 같습니다.
작자미상, <잔 에뷔테른>, 1916년경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작자미상, <잔 에뷔테른>, 1916년경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러한 철학은 그가 1917년 봄, 자신의 마지막 연인이자 배우자였던 열 아홉 살의 미술학도 잔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 1898~1920)을 만나면서 최고조에 이르게 됩니다. 모딜리아니와 잔은 서로 첫눈에 반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조각 같은 외모 속 긴 목선, 붉은 머리칼과 연한 녹색 눈동자를 지닌 젊은 여인의 모습에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녀는 쇠약하지만 섬세한 매력을 풍기는, 자신보다 열 네 살이나 많은 사내가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호기심과 관심을 품게 된 것이죠. 이 만남 이후 모딜리아니는 잔을 열정적으로 그려 나갔습니다. 그녀를 단순히 나체를 그릴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음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약 스물여섯 점에 이르는 작품 속에 잔을 담았으나, 그중 누드화는 단 한점도 없었으니까요. 대신 모든 초상 속에서 잔의 눈은 매번 다르게 표현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눈동자가 밝은 녹안이었다고 말하지만, 작품 속에서 그 색채를 온전히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지요. 그녀를 만난지 얼마 안된 상태에서 만들어낸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이나 삶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시기에 완성한 잔의 마지막 초상화 <빨간 숄을 두른 잔 에뷔테른> 속에서 그녀의 눈은 불투명한 파란색으로 흐리고 깊게 비어 있습니다.
[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1918년, 개인 컬렉션 소장  [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빨간 숄을 두른 잔 에뷔테른>, 1919년, 개인 컬렉션 소장
[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1918년, 개인 컬렉션 소장 [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빨간 숄을 두른 잔 에뷔테른>, 1919년, 개인 컬렉션 소장
반면,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의 첫 초상화라고 전해지는 <목걸이를 두른 잔 에뷔테른>과 그 다음 해에 그려진 <잔 에뷔테른의 초상>에서는 그녀의 눈이 푸른색과 흑갈색의 다른 색깔로 각각 조심스럽게 완성되어 있습니다. 비록 모딜리아니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을지라도, 잔의 영혼을 온전히 붙잡는 일은 끝내 쉬운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는 아마도 쉼 없이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쳐가는 눈빛의 순간을 붙잡으려 애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 깊은 결을 읽어냈다고 믿는 찰나마다, 서둘러 그녀를 다시 캔버스 앞에 앉히고 붓을 들었겠지요. 그러나 불안한 삶 속에서 그 마음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듯, 금세 심연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연한 녹안의 그녀는 어떤 초상에서는 불투명하게, 또 다른 작품에서는 푸른빛을 띠거나, 혹은 깊은 흑갈색으로 나타났습니다. 모딜리아니가 남긴 수많은 잔의 초상은, 결코 완벽히 담아낼 수 없었던 한 영혼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이자, 끝내 다가서지 못한 화가의 고백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은, 아마도 모딜리아니만이 알고 있었겠지요.
[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목걸이를 두른 잔 에뷔테른>, 1916-17년, 개인 컬렉션 소장  [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잔 에뷔테른의 초상>, 1918년, 개인 컬렉션 소장
[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목걸이를 두른 잔 에뷔테른>, 1916-17년, 개인 컬렉션 소장 [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잔 에뷔테른의 초상>, 1918년, 개인 컬렉션 소장
과묵하고 내성적이었던 잔은 방황하던 예술가 모딜리아니에게 잠시나마 고요를 선사하는 듯했습니다. 그녀가 그의 중독을 끊게 하거나 결핵을 치유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깊은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했지요. 화상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와 친구들은 그녀가 그의 혼란스러운 삶에 질서를 가져다 주기를 바랐으나, 끝내 그것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방탕한 생활은 갈수록 심해졌고, 그의 기침은 점점 잦아졌으며, 말년에는 마약으로 인한 정신병까지 앓게 됩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잔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인내했습니다. 1918년, 딸 잔 모딜리아니(Jeanne Modigliani, 1918~1984)를 품에 안은 이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1920년 1월, 모딜리아니는 평생 그를 괴롭혀온 병세가 악화되어, 결핵성 수막염으로 35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합니다. 다음 날, 깊은 사랑과 상실감에 잠긴 잔은 둘째 아이를 임신한 지 여덟 달 된 몸으로 부모의 집 5층 창문에서 자신을 내던져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차갑게 식은 그녀의 주검은 그날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 한 살이었습니다.

외면과 요절… 그리고 너무 뒤늦게 도착한 영광

1920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메데오모딜리아니가 남긴 것은 작품들뿐이었습니다. 그는 부동산도, 저축도, 심지어 자신의 작업실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그림들은 재발견되었고, 독창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은 점차 미술계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즈보로프스키의 누드화 연작’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사랑받는 유화가 되었습니다. 2015년, 그의 대표작 <누워있는 누드>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무려 1억 7,040만 달러에 낙찰되어, 당시 역대 경매가 상위 10위에 올랐습니다. 같은 시기 제작된 <누워있는 누드(왼쪽으로)>, <파란 쿠션 위에 누워있는 누드> 등도 경매에서 1억 달러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그림들은 한때 파리의 작은 갤러리 전시 창에 걸렸다가 모델의 음모가 보인다는 이유로 경찰이 출동해 철거 명령을 내렸던 바로 그 작품들입니다. 길거리의 행인들을 격분 시킨 외설적 그림이, 한 세기 뒤에는 세계의 부호들이 서로 소장하려 애쓰는 값비싼 걸작이 된 것입니다.

모딜리아니의 사후 명성은 온통 이런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당대에는 그저 ‘나쁘지 않은 범작’을 만들었다는 소박한 평가를 받았지만, 이제 현대미술에서 누드화의 장르를 새롭게 재정립한 위대한 대가로 찬사 받습니다. 길게 늘어진 얼굴, 공허한 눈, 우아함으로 대표되는 그의 독창적인 화풍은 어디서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작품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한때 그가 무심코 나눠주거나 헐값에 팔았던 그림들을 수집가들이 앞다투어 사들였고, 오늘날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파리 퐁피두 센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등 세계 주요 예술기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미국 필라델피아의 반스 재단과 워싱턴 D.C.의 국립미술관은 가장 큰 모딜리아니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상당한 양의 그의 창작물은 이제는 더 이상 볼 수가 없는데요. 이는 모딜리아니 본인의 완벽주의 성향으로 가치 없다고 판단한 작품은 과감히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잦은 이사와 떠돌이 생활을 한 그는 체계적인 기록과 보관을 남길 수가 없었습니다. 연인, 집주인, 카페 주인에게 그림을 건네는 일도 잦았는데, 종종 돈 대신 그림을 내밀었다가 모욕을 당하거나 쫓겨나는 일화는 매우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 그 그림들이 훗날 수백만 달러의 가치가 될 것이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정작 모딜리아니와 그의 연인 잔 에뷔테른은 이 모든 영광을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짧고 고단했던 삶은 비극으로 끝났고, 눈부신 재평가와 부와 명예는 모두 사후에 찾아왔습니다. 만약 그들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아 있었다면, 세계 곳곳의 미술관과 경매장에서 자신의 작품이 수천억 원에 거래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경외하며 속삭이는 모습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삶의 안정과 예술적 인정이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들의 모습을 더 씁쓸하게 만듭니다.

이지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