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 누드화 탓에 개인전까지 몽땅 털린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rte] 이지호의 선 넘는 예술이야기
개인전도, 사랑도, 목숨까지 탈탈 털린 저주받은 천재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길게 늘어진 목, 텅 빈 눈동자…
그가 그린 건 누드가 아니라 영혼이었다
천재, 술꾼, 연인, 결핵환자 그는 이 모든 것이었다
개인전도, 사랑도, 목숨까지 탈탈 털린 저주받은 천재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길게 늘어진 목, 텅 빈 눈동자…
그가 그린 건 누드가 아니라 영혼이었다
천재, 술꾼, 연인, 결핵환자 그는 이 모든 것이었다
붐비는 번화가를 지나던 행인들은 갤러리 앞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이색적인 누드화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 중에는 모딜리아니가 전시를 위해서 같은 해 그린 <산호 목걸이를 걸친 누드>도 걸려 있었지요. 캔버스 속 갈색머리를 한 여인은 자신의 풍만한 몸을 드러낸 채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다리를 살짝 벌린 채,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 모습으로 윙크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손으로 살짝 가려진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은밀히 드러난 털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전시가 열린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 소박하게 표현된 털 때문에 소동이 벌어지게 됩니다. 갤러리 입구에는 ‘그곳의 털이 보이는 여자 그림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성난 군중들이 점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는 그림을 보고 음흉하게 웃었고, 일부는 냉소적이었으며, 몇몇은 놀란 듯 성호(聖號, 십자가 모양)를 긋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경찰관들이 신고를 받고 도착했답니다. 분노한 인파 속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경찰은 갤러리에 들어와 창 밖에서 보이는 모든 누드화를 철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여성, 아이들, 그리고 점잖은 신사들이 활보하는 거리에 이런 불온한 그림이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유였지요. 경찰과 행인들이 모딜리아니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것은 뿜어져 나오는 고상함이 아닌, 그저 작은 ‘삼각형’에서 흘러나오는 저속함뿐이었죠. 당시 파리 사회에서 여성의 나체 자체는 이미 낯선 주제가 아니었지만, 음모가 도드라진 모습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서른세 살의 모딜리아니, 그의 인생 첫 개인전은 이렇게 시작부터 삐걱거렸습니다. 평생 준비해 온 데뷔 무대가 선정성으로 세간의 화제를 일으키다니… 그는 타 들어가는 분노를 억눌러가며 자신의 작품이야말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예술’이라고 강력히 항변했지만, 그의 변호는 끝내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결국 경찰관들의 조치는 전시 중단으로 이어지고 그의 누드화들은 보이지 않는 갤러리 뒤편으로 옮겨집니다. 비록 갤러리 전시는 예정보다 일찍 문을 닫았지만, 모딜리아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예술계에 확고히 하게 됩니다. 게다가 그날 그림도 두 점 정도 팔아 앞으로 며칠 동안은 끼니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죠. 하지만 왜일까요?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씁쓸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혼신을 다해 그린 여성들이 고작 털 때문에 천박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사실이, 깊고도 무거운 응어리처럼 남았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낸 이단아
소란으로 막을 내린 1917년 모딜리아니의 개인전은 그가 살아 생전에 연 유일한 전시이자, 동시에 마지막 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부터 갤러리는 정상 운영을 재개했지만, 전면 유리창을 통해 가장 잘 보이던 누드화들은 이미 모두 치워진 후였지요. 모딜리아니 예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누드화들이 빠진 전시는 이미 생명력과 의미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의 누드화 속 여성들은 다른 화가들의 것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길게 늘어진 목과 얼굴, 부드럽게 흐르는 곡선, 살짝 기울어진 자세 속에서도 은밀하고 관능적인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가끔씩 투명하게 처리된 눈빛은 관람자를 직시하면서도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해서, 그 애매한 표정에는 단순한 유혹을 넘어선 인간적인 깊이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딜리아니는 어떻게 이런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낸 걸까요?
모딜리아니는 1884년, 이탈리아 서부해안의 항구도시 리보르노의 유서 깊은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한때 부유했던 집안은 그의 탄생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파산 위기에 처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의 탄생이 가족의 재산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었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는 임산부나 갓난아기를 둔 산모의 침대는 채권자가 압류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어머니가 진통을 겪고 출산을 하던 그 순간, 집행관들이 집안으로 들이닥친 것인데요. 가족들은 집안의 가장 귀중한 물건들을 서둘러 산모의 침대 위에 쌓아 올려 재산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족을 위기로부터 구원한 모딜리아니의 비범한 출생과는 달리, 그는 어린 시절부터 늘 병약했습니다. 열한 살 때 앓은 늑막염을 시작으로 장티푸스와 폐결핵까지 차례로 겪으며 목숨을 잃을 뻔한 경험을 여러 번 하게 됩니다. 이런 잦은 병마와의 싸움은 일찍부터 내세와 내면에 깃든 영혼에 관한 깊은 관심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모딜리아니는 특히 어머니 외제니 가르생(Eugénie Garsin, 1855~1927)과 깊은 유대감을 나누었는데요, 아들의 예술적 감수성을 늘 격려하던 어머니는 그를 열 살까지 집에서 직접 가르치며, ‘이 아이는 예술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주변에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병세가 호전된 모딜리아니는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예술적 안목을 키우게 되는데요. 나폴리, 카프리, 로마, 아말피를 거쳐 피렌체와 베네치아까지 이어진 여정에서 그는 르네상스의 유산과 고전 조각, 그리고 이탈리아 특유의 빛과 색채를 직접 마주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평생 탐구하게 될 ‘고전적 아름다움과 현대적 표현의 융합’이라는 예술적 성향을 결정짓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1906년, 그는 마침내 파리로 건너가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 일대의 보헤미안 예술가 무리에 합류했습니다. 파리에서 모딜리아니는 처음에는 고상한 예술가의 이미지를 유지하려 했으나, 곧 압생트와 마약에 손을 대고 창녀촌을 드나드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습니다. 사치스러운 소비로 금세 돈을 탕진했고, 건강마저 악화되었지만 작업에 대한 열정만큼은 결코 식지 않았습니다. 여러 전위적인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그는 점차 이탈리아에서 배운 고전 아카데미 회화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했고, 기존에 몸에 밴 기법과 규범을 과감히 내려놓으며 자신만의 화풍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흐름이었지만, 모딜리아니에게 그것은 스스로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 1876~1957) 등과 교류하며 강한 예술적 자극을 받았습니다. 특히 조각을 바라보는 브랑쿠시의 시각과, 이집트·그리스·아프리카 부족 예술을 연상시키는 브랑쿠시 작품의 직관적이며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는 모딜리아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916년부터 1919년 사이,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상징적인 누드화들을 탄생시킵니다. 이는 비스듬히 눕거나 앉아있는 여성들을 그린 열정적인 연작으로, 뜨거운 열기와 폐쇄된 공간 속 짙은 친밀감을 머금고 있습니다. 이 연작은 일찍이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 폴란드 출신 미술상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Léopold Zborowski, 1889~1932)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안정적으로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즈보로프스키는 그의 전속 판매원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되기로 한 것인데요. 그에게 작업실, 재료, 그리고 하루 15프랑(현재 가치로 약 10만원 추정)의 일당을 제공했습니다. 더구나, 모딜리아니가 모델을 구하기 어려워할 때면, 그는 기꺼이 자신의 아내 안나 즈보로프스카(Hanka Zborowska, 1885~1978)를 그릴 수 있도록 배려하며, 오후에는 자택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답니다. 이 실용적이면서도 결정적인 지원 덕분에, 모딜리아니는 경제적 불안에서 잠시 벗어나 조각적 원칙에 기반한 이색적인 ‘즈보로프스키 누드화 연작’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단순히 과거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의 유산을 자신의 회화 속에 불러와, 20세기적 감각과 인간적인 온기를 불어넣은 사례입니다. 그는 전통에 기대면서도 그것을 새롭게 쓰는 방법을 알았고, 그 과정에서 과거의 명화들은 그에게 하나의 경의의 대상이자, 동시에 재조립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불과 3년 사이, 그는 30점이 넘는 탁월한 누드화를 완성했고, 이 작품들은 모딜리아니가 조각적이고 입체적인 인간의 신체를 평평한 회화 속으로 완벽하게 단순화하고 정제한 대표적인 성취로 평가됩니다. 그는 불필요한 세부적인 요소들을 덜어내면서도 형태의 본질과 따뜻한 감성을 고스란히 남겨, 오늘날까지도 그의 예술 세계를 상징하는 강렬한 유산으로 남게 된답니다.
모딜리아니 소녀와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
모딜리아니가 초상화 속 인물의 눈을 비워둔 것은 단지 자신의 그림이 조금 더 특색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부린 기교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지병을 안고 살았던 병약한 그에게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가득했습니다. 흔히 ‘눈은 영혼을 들여다보는 창’이라고 말합니다. 동일한 선상에서, 지인들이 왜 인물의 눈을 잘 그리지 않느냐고 묻자 모딜리아니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영혼을 들여다 봤을 때, 저는 비로소 당신의 눈을 그릴 것입니다.”
모딜리아니에게 눈이라는 것은, 그저 성의 없이 채워 넣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나 봅니다. 오직 대상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눈으로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었을 때만 그 신성한 영역을 화폭 위에 완성했던 것 같습니다.
외면과 요절… 그리고 너무 뒤늦게 도착한 영광
1920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메데오모딜리아니가 남긴 것은 작품들뿐이었습니다. 그는 부동산도, 저축도, 심지어 자신의 작업실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그림들은 재발견되었고, 독창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은 점차 미술계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즈보로프스키의 누드화 연작’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사랑받는 유화가 되었습니다. 2015년, 그의 대표작 <누워있는 누드>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무려 1억 7,040만 달러에 낙찰되어, 당시 역대 경매가 상위 10위에 올랐습니다. 같은 시기 제작된 <누워있는 누드(왼쪽으로)>, <파란 쿠션 위에 누워있는 누드> 등도 경매에서 1억 달러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그림들은 한때 파리의 작은 갤러리 전시 창에 걸렸다가 모델의 음모가 보인다는 이유로 경찰이 출동해 철거 명령을 내렸던 바로 그 작품들입니다. 길거리의 행인들을 격분 시킨 외설적 그림이, 한 세기 뒤에는 세계의 부호들이 서로 소장하려 애쓰는 값비싼 걸작이 된 것입니다.
모딜리아니의 사후 명성은 온통 이런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당대에는 그저 ‘나쁘지 않은 범작’을 만들었다는 소박한 평가를 받았지만, 이제 현대미술에서 누드화의 장르를 새롭게 재정립한 위대한 대가로 찬사 받습니다. 길게 늘어진 얼굴, 공허한 눈, 우아함으로 대표되는 그의 독창적인 화풍은 어디서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작품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한때 그가 무심코 나눠주거나 헐값에 팔았던 그림들을 수집가들이 앞다투어 사들였고, 오늘날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파리 퐁피두 센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등 세계 주요 예술기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미국 필라델피아의 반스 재단과 워싱턴 D.C.의 국립미술관은 가장 큰 모딜리아니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상당한 양의 그의 창작물은 이제는 더 이상 볼 수가 없는데요. 이는 모딜리아니 본인의 완벽주의 성향으로 가치 없다고 판단한 작품은 과감히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잦은 이사와 떠돌이 생활을 한 그는 체계적인 기록과 보관을 남길 수가 없었습니다. 연인, 집주인, 카페 주인에게 그림을 건네는 일도 잦았는데, 종종 돈 대신 그림을 내밀었다가 모욕을 당하거나 쫓겨나는 일화는 매우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 그 그림들이 훗날 수백만 달러의 가치가 될 것이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정작 모딜리아니와 그의 연인 잔 에뷔테른은 이 모든 영광을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짧고 고단했던 삶은 비극으로 끝났고, 눈부신 재평가와 부와 명예는 모두 사후에 찾아왔습니다. 만약 그들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아 있었다면, 세계 곳곳의 미술관과 경매장에서 자신의 작품이 수천억 원에 거래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경외하며 속삭이는 모습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삶의 안정과 예술적 인정이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들의 모습을 더 씁쓸하게 만듭니다.
이지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