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임코치의 컨피던스 코칭] 내 안에 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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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결사에 나오는 내용의 한 구절이다. 오늘은 고래(古來)의 대한민국 수험생 모두를 긴장시킨 성산별곡이 탄생한 장소, 식영정(息影亭)이라는 정자에 관한 이야기다. 코칭의 핵심인 ‘내 안에 너 있다’ 이야기다.
대한민국에는 식영정이란 이름의 정자(亭子)가 두 개 있다. 모두 빼어난 자태, 오랜 역사와 스토리를 각각 갖고 있는 문화재다. 둘 다 전라남도에 있다. 하나는 무안에, 다른 하나는 담양에 있다. 담양의 식영정이 1,500년대, 무안의 식영정은 1,600년대에 각각 최초 만들어졌다.
둘 다 물이 바라다 보이는 빼어난 산수에 위치했다. 둘의 ‘한글 이름’이 같다. ‘한글’이라고 강조한 이유가 있다. 한문으로는 다르다. 첫 글자인 식(息)과 마지막 글자인 정자를 표시하는 정(亭), 두자만 같다. 중간의 ‘영’자는 다르다. 하나는 그림자를 뜻하는 영(影)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영(營)이다. 앞은 영상(影像)같은 말에 쓰이고, 뒤의 영은 영업(營業) 같은 곳에 쓰인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들은 추정하기 시작할 것이다. 식영(息影)과 식영(息營)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왜 정자 이름에 이런 말이 들어가 있는지. 그 해답은 식(息)에 있다. 식(息)은 ‘쉬게 한다’는 말이다. 휴식(休息)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럼 식영(息影)과 식영(息營), 도대체 뭘 쉬게 한다는 말인가? 말 그대로라면 ‘그림자를 쉬게 한다’, ‘추구함을 쉬게 한다’는 말이다. 즉, 멈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발견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전라남도에 있지만, 두 식영정 간의 거리는 현재의 자동차 길로 76km가 떨어진 곳에 있다. 당시로 생각해 보면 산 넘고 물 건너 가는 길이니 족히 100km는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각각 만들어진 시기도 100여 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그런데 어떻게 똑같은 의미를 가진 정자를 만들었을까? 두 식영정 간의 연결고리는 기록에 없다. 다만 두 현자(賢者)의 세상살이 방식이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셀프 코칭을 하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이것을 코칭의 시각으로 풀어본다. ‘내 안에 너 있다’라는 코칭의 기본 철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은 무한 가능성을 갖고 있고, 또 모든 문제의 해답을 갖고 있다’는 말과 같다. 즉, 사람 안에 ‘그도 모르는 다른 그’가 있는 것이다. 코칭은 그것을 일깨워 주는 과정이자, 결과다. 식영(息影, 또는 息營)이라는 말이 왜 나왔을까? 어떤 의미일까? 코칭에 그 답이 있다.
사람이 움직이면 반드시 따라오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림자, 다른 하나는 발자국 소리다. 남민 작가의 ‘내 삶을 바꾸는 인문여행’ 제목의 강연자리에서 이 궁금증을 해소했다. 달변의 강사 남민 작가의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다 금과옥조였다. 식영정(息影亭) 이야기도 여기서 나왔다.
남민 작가의 설명을 빌려 본다. 어떤 사람이 ‘평생을 따라다닌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늘 따라오는 그림자도, 발자국 소리도 그의 사색에 방해가 되었을 법하다. 그리고, 백방으로 그 해답을 찾아보려 했으나 도대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늘로 들어가면 그림자는 없어지는데, 발자국 소리는 따라왔다. 다시 나와 멈추면 발자국 소리는 안 들리는데, 그림자가 어느새 발끝에서 속삭이는듯 하다. 나는 평생을 같이 할 거야. 이쯤 해서 독자 제현의 스마트한 두뇌로 아래 글을 읽기 전에 한번 상상해 보시길 권한다. 생각할 시간 5분 드린다.
충분히 상상을 해 보셨을 거라 생각하고 이제 다시 돌아가 보자. 고민이 깊어지던 어느 날, 무더위를 피해 그늘에 들어가 앉아서 쉬었다. 무더위가 사라질 즈음, 그는 문득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가 어디 갔지?’ 생각했다. 아, 내가 그늘에 들어가 무더위를 피하니 그림자도, 발자국 소리도 사라지는구나. 드디어 그를 그렇게 괴롭힌 문제가 풀렸다. 원본은 장자(莊子)의 어부(漁父)편 외영오적(畏影惡迹)이다. 외영오적은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다’라는 의미다.
다시 다른 식영정(息營亭)으로 가보자. 무안에 있다. 담양에 비해 늦게 생겼다. 그런데, 중간 한자만 다르지 의미가 정확히 같다. 무안 식영정을 만든 사람은 임연(1588~1648)이라는 사람이다.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일생을 분주하게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글이 있다.
“관직에 몸담고 있음은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새와 어찌 다르랴? 오직 아름다운 산수를 얻어 한가롭게 살지 못함이 한이로다”(한국학호남진흥원 홈페이지 ‘호남학 산책’에서 발췌)
오죽했으면 그의 호는 한호(閒好)다. 한가로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한호거사(閒好居士)로 불리기도 했다. 그가 이 고민에서 벗어난 것이 식영(息營)이다. 추구하는 것을 쉬게 한 것, 즉 식영(息營)이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식영(息營) 이전에 선택했던 것이, 바로 만휴(晩休)다. ‘늦었지만 쉰다’는 말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늘그막에 한가히 즐기려는 생각’이다. 그래서 만휴당(晩休堂)을 먼저 선택했었다. 그런데 만휴(晩休)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쯤에서 정자(亭子) 이야기는 마치려 한다. 오늘 이야기는 그들이 그 고민을 해결한 방법을 코칭 관점에서 본 것이다. 담양의 식영정(息影亭)은 그림자 때문에 고민하던 사람이 이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무안의 식영정(息營亭)은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던 사람이 어떻게 답을 찾았는지가 핵심이다. 컨피던스 코칭을 지향하는 ‘더임코치’의 결론은 ‘내 안에 너 있다’이다. 여기서 너는 ‘다른 나’다.
무슨 말일까? 독자들은 이미 그 의미를 충분히 꿰뚫었을 것이다. 독자들 생각대로다. ‘내 안’에는 ‘다른 나’가 있다. 코칭의 기본 철학을 되새겨 본다. 모든 사람은 무한 가능성, 즉 잠재력을 갖고 있다. 또, 모든 문제의 해결 방안은 자신이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가 그 답이다. 바로 ‘다른 나’다. 무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해결 방안을 이미 가지고 있음에도 생각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역사에 대한 배움이 충분하지 못함을 인정한다. 그래서 더 깊이 못 간다. 그럼에도 이 말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식영(息影) 과 식영(息營)은 ‘다른 나’를 보여주는 키워드다. 이들 스스로, 또는 학문을 교류한 주변의 누군가가 깨우침을 주었을 수 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또 다른 나’를 그들이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식영정이라는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식영정(息影亭)에서 만들어진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성산별곡(星山別曲)은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코칭은 그렇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무한 가능성, 즉 잠재력과 문제 해결 방안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한다. 모든 사람에게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다른 나’를 찾게 한다. 그래서 ‘다른 나’는 ‘지금의 나’로 하여금 눈을 뜨게 만든다. 그 과정과 결과가 코칭이다.
더임코치의 컨피던스 코칭은 더더욱 그렇다. 존재에서 강점을 찾고, 강점이 자신감이 되도록 선순환 사이클을 만든다. 후대에 남을 또 다른 식영정을 만드는 것, 그게 컨피던스 코칭인 것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더임코치/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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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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