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천장에 담고, 문지방 공유하는 집…'불편해야'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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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요시 주택 ·판교하우징·루브르가
가치 있는 '건축'인 이유
튀는 건물만 넘치는 불편한 진실
안도 다다오, 자연과 관계 중시
방 마주보고 프라이버시 허물어
판교하우징 설계한 야마모토
유리 현관방 통해 이웃과 소통
자연스레 공동체 본질 일깨워
루브르 앞 유리 피라미드
대형 온실 비판여론 들끓었지만
미래지향적 구조물로 평가 받아
가치 있는 '건축'인 이유
튀는 건물만 넘치는 불편한 진실
안도 다다오, 자연과 관계 중시
방 마주보고 프라이버시 허물어
판교하우징 설계한 야마모토
유리 현관방 통해 이웃과 소통
자연스레 공동체 본질 일깨워
루브르 앞 유리 피라미드
대형 온실 비판여론 들끓었지만
미래지향적 구조물로 평가 받아
골목에 면한 집의 정면은 구멍 하나만을 가진 무심한 콘크리트 벽이다. 내부는 더 심하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집을 두 채로 나눠 식당, 화장실을 가려면 비를 맞아야 한다. 안방과 애들 방이 서로 마주 보게 만들어 프라이버시란 없다. 오죽하면 일본건축학회상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이 상은 건축가가 아니라 거주자에게 줘야 한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까?
친절한 건물, 불편한 건축
불편한 이 집은 왜 주목받게 됐을까? 바로 ‘집의 본질’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느 도시주택과 달리 이 집은 하늘을 집안에 머금고 있다. 설사 비를 맞더라도 집이라는 공간은 자연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울러 식구끼리는 서로 마주 보고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무겁지만 미니멀한 파사드를 통해 집의 내부가 시끄러운 도로가로부터 보호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집을 우리 시대의 ‘최애 상품’인 아파트와 비교해 보자. 아파트는 친절하고 편리하며 예쁘기까지 하다. 그러나 거주자에게 자연이란 창 너머 경치가 전부이고 방문을 닫으면 식구도 남이 된다. 단지의 게이트와 건물 꼭대기에 멋진 장식을 달고 있지만 거주자의 삶보다는 아파트의 위신과 가격을 위해서임을 모르지 않는다.
수많은 건물 중 ‘집의 본질’을 깨닫게 이끄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건물(building)’과 굳이 구별해 ‘건축(architecture)’이라고 칭한다. 모든 건물이 건축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스미요시 주택 사례처럼 건축은 때로 당혹스럽게 한다. 거주자에게 상을 줘야 한다는 말은 불편함을 무릅쓰고 건축가의 실험에 동참해 시대를 가르는 ‘건축’이 나타나게 만든 건축주를 상찬하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이처럼 건축은 훌륭한 건축주에 의해 탄생한다.
미분양 판교하우징과 인문학으로서의 건축
작년 프리츠커상은 일본의 야마모토 리켄에게 돌아갔다. 우리나라에 있는 두 개의 작품 중 판교하우징은 필자가 대표로 있던 회사와의 협업으로 지어졌다. 그가 그린 초기 스케치를 보고 경악한 기억이 새롭다. 연립주택인데 수평으로 연립해 한 가구가 3개 층을 쓴다. 더구나 거실은 지하에 두고 1층은 유리방으로 만들어 현관으로만 사용하도록 했다.
이 역시 ‘불편한 집’이 공동체와 더불어 사는 집의 본질을 알게 한 사례다. 열려 있어야 더 넓게 쓸 수 있다는 것, 나를 드러내야 비로소 이웃이 생긴다는 것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건축은 공학이나 예술이기에 앞서 인문학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법을 공간적으로 탐구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으로서의 건축’ 반대편에 ‘건설로서의 건축’이 있다. 여기서는 ‘사람답게’ 대신 ‘욕망’이 목적어가 된다. 편하고 친절해 사용자의 욕망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현시욕을 만족시킬 독특한 외관을 갖추면 더욱 좋은 것으로 대접받는다. 하나의 재화로서의 건물이 사용성과 심미성을 지니고자 하는 것이 결코 비난받을 바는 아니다. 문제는 건축주의 욕망에 봉사할 따름인 건물이 건축인 척하면서 ‘건축’을 구축해 버리는 상황이다.
한 해 5000여 동이나 지으면서도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우리의 공공건축을 돌아본다. 현상공모에서 실험적인 건축은 잘 채택되지도 않지만 설사 되더라도 살아남지 못한다. 건설 시대의 덕목을 담은 지극히 기능적인 건물 혹은 단체장의 저급한 취미를 반영한 키치로 둔갑한다. 리켄 자신도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거니와 그가 외국인이 아니었다면 판교하우징도 LH의 등쌀에 일찌감치 훼절돼 그렇고 그런 빌라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루브르 논란과 텍스트로서의 건축
1989년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맞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유럽 문화 수도로서의 파리의 위상을 회복하겠다는 포부로 ‘그랑프로제(Grand Project)’ 사업을 시작한다. 그중 하나인 루브르박물관의 새 출입구 설계는 중국계 미국 건축가 이오밍 페이가 맡았다. 계획안이 발표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고전적 건물 앞에 대형 온실이 들어선 격이니, 국보 설계를 외국인에게 맡겼느니…. 마치 100년 전 에펠탑 건립과 18년 전 퐁피두센터 공모 때와 흡사한 논란이 재연됐다.
그럼에도 미테랑 대통령은 공모 절차도 없이 선정한 건축가와 그의 설계를 끝까지 지켜줬다. 루브르를 찾는 누구라도 고전풍의 본관을 유리 피라미드의 배경으로 놓고 사진에 담는다. 페이 안의 어떤 점이 미테랑 대통령을 사로잡았을까? 그렇다. 피라미드의 기하학은 루브르보다 더 오래된 조형이되 재료는 가장 미래지향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동체 혹은 시대적 가치를 표상한다는 측면에서 건축은 텍스트다. 이 텍스트를 정교하게 독해하고 그 의미를 역사적 맥락과 시대적 경향을 거울삼아 드러내는 작업을 건축 비평이라고 한다. 우리 건축의 저급함과 품격 없음은 한국 건축 비평의 부재와 관련이 깊다. 각종 매체와 SNS에 소위 ‘핫한’ 건축물에 대한 소개 글은 넘치나 그 건축의 인문학적인 독해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건물’이 ‘건축’을 몰아내는 기제로 작용한다. 대중과 상업적 건물주들은 ‘튀는 건물’을 원하게 되고 공공건축의 발주자와 심사자들도 가치 있는 건축보다는 실용적이며 저차원적 상징성을 실은 안을 고른다. 건축가들 또한 자기검열을 통해 실험적 건축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 부끄러운 공공건축이 버젓이 들어서고, 일본과 한국의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10 대 0인 이유다. K푸드, 봉준호, BTS처럼 우리 건축도 세계 속에서 자랑스러워질 수 있을까. 친절한 ‘건물’ 대신 이들에게 불편한 ‘건축’을 허하는 도량 넓은 건축주들이 도착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함인선 건축가·한양대 건축학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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