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이제 하얀 민들레로 오셔요. 고성 안국사 대웅전 뒤편 산기슭에 꽃장(葬)한 어머니의 꽃밭으로, 어머니의 이름으로 우리 꽃 하얀 민들레로 오셔요. 한 꽃밭 가득히 피어서 오셔요. 서른둘에 홀로 돼 사신 반백 년에 몇 해 더 더한 세월은 눈물 피눈물로 다 적지 못할 시입니다. 목이 메어 다 부르지 못할 노래입니다. 하얀 민들레는 어머니의 노래입니다. 일편단심의 거룩한 꽃입니다. 어린 남매 데리고 한(恨)의 바다를 떠돌다가 마지막 항구로 돌아온 노스탤지어의 귀항입니다. 마지막 살다 가신 음력 사월 초하루 봄비로 오셔서 민들레로 일어서셔요. 바람으로 돌아와 하얀 민들레로 걸어오셔요. 천왕산 산정까지 하얀 꽃들이 다 함께 맨발로 일어서 춤추게 하셔요. 하얀 민들레꽃들 둥근 법열의 꽃씨로 맺혀 도리천으로 훨훨 날아가게 하셔요. 저도 다시 어머니의 꽃으로 활짝 피게 하셔요. 우리 모두 피어나 어머니께로 돌아가게 하소서. 언제나 따스했던 어머니 슬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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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올봄에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평소에 ‘나 죽으면 그냥 재로 훨훨 날려달라’고 했는데 그래도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어디로 가야 할까 해서 제 도반이 하는 절집 뒤에 꽃밭을 만들고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그 위에 하얀 민들레씨를 뿌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붉은 꽃을 심고 꽃밭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꽃장(葬)입니다. 내년에 민들레가 필 무렵 저는 어머니가 반드시 민들레로 돌아오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있는 별마당도서관의 명사 초청 특강 시간. 정일근 시인이 최근 펴낸 시집 <꽃장>(불휘미디어 펴냄)의 표제작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줬습니다. 이번 시집은 지난 4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께 올리는 시인의 사모곡입니다. 어머니의 49재 회향일(廻向日)에 맞춰 그동안 어머니를 위해 썼던 시 34편과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시 14편,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된 뒤에 쓴 신작 10편을 모은 것입니다.
정일근 시인에게 어머니는 각별한 문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제 어머니는 저를 시인으로 만들었는데, 어머니 생전에 왜 이 시집을 내지 못했을까 후회가 컸다”면서 서른둘에 혼자 되어서 여든여덟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직 자식들을 위해 살았던 어머니의 삶을 영상처럼 회고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셋방이 딸린 작은 아구찜 식당을 운영하며 가족의 생계를 이었습니다. 30대에 청상이 된 어머니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어린 아들의 슬픔 또한 감당하기 어려웠지요. 그 슬픔이 소년에게 시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소년은 혼자 시를 읽고 또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었고, 마침내 직접 시를 쓰게 됐습니다. 그렇게 쓴 시가 ‘아구’였습니다.
백일장에 나간 그가 장원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어머니의 찌든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처음 본 그는 그때부터 어떻게든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어머니는 큰마음 먹고 안데르센 동화집을 사주셨습니다. 12개월 할부였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시인으로 만든 어머니는 이후에도 수많은 시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중고교 교과서에 실린 시만 해도 세 편이나 됩니다. 이날 시인은 이 세 편의 시를 연이어 소개했습니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 밥상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 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 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 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 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 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 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 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 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 먹고 싶다
“어머니는 두레 밥상을 둘레판이라고 했어요.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던 두레의 협동 정신에서 나온 것인데, 어머니는 우리 식구들이나 친구들이 와도 늘 그 판을 펴고 밥상을 차려주었지요. 어머니는 손이 컸습니다. 아구찜 장사할 때도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오면 항상 그 판을 펴서 푸짐하게 차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지금 세상은 어떤 밥상을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묻고는 젊은 친구들이 ‘혼밥’을 많이 하는 세상, 혹은 밥상을 뺏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여야 되는 세상의 그늘을 돌아보며 어머니의 밥상 정신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모두를 귀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나눈다는 것은 많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이것이 어머니의 밥상 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에게 많이 배웠고 어머니 덕에 많은 친구를 가졌습니다.”
어머니의 그륵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찿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 있도록 불러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어머니의 탯말, 뱃속에서부터 들어왔던 말, 어머니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두 시가 되고 가르침이 된다는 것을 나이 들면서 깨달았습니다.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말을 만드셨지요. ‘그륵’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진해에 못 가겠어요. 진해가 제 고향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수정합니다. 어머니가 제 고향입니다. 어머니가 계셔서 어머니 집에 가서 발 펴고 다시 먹고 따뜻한 밥 먹을 수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거, 어머니가 안 계신다는 것은 제가 실향민이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그는 “어머니의 말씀이야말로 생을 통해서 전 인생을 통해서 배운 말의 철학”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문지 밥상
더러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가 있는데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꼭 밥상 펴라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신문지가 무슨 밥상이나고 궁시렁궁시렁하는데요 신문질 신문지로 깔면 신문지 깔고 밥 먹고요 신문질 밥상으로 펴면 밥상 차려 밥 먹는다고요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어머니 또 한 말씀 가르쳐 주시는데요
해방 후 소학교 2학년이 최종 학력이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의 말씀 철학
“제가 산골에 들어가 어머니와 같이 산 적이 있는데 밥때가 되면 밥상 대신 신문지를 깔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 꼭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냥 밥상 펴라. 엄마 이거 밥상이 아니고 신문지다. 야야 니가 그걸 신문지로 보면 니는 신문지 위에서 밥 먹는 것밖에 안 돼. 그때 정말로 머리가 번쩍했습니다. 학교 윤리 시간, 도덕 시간, 철학 시간이 아니라 어머니가 신문지 한 장을 통해서 저를 가르쳤습니다.”
어떨 때는 어머니에게서 ‘여자’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가 마흔이 되던 해 뇌종양 진단을 받고 대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을 때 어머니의 보살핌 덕분에 살아났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갑상선암에 걸려 입원했습니다. 이번엔 내가 어머니를 살려낼 차례라고 결연한 마음을 먹고 노모의 병수발에 나선 그는 어머니가 벗어놓은 속옷을 보고 그만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꽃 수가 새겨진 분홍 팬티가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분홍 꽃 팬티
어머니 병원 생활하면서 어머니 빨래 내 손으로 하면서 칠순 어머니의 팬티 분홍 꽃 팬티라는 걸 알았다 어머니의 꽃피던 이팔청춘 아버지와 나누던 사랑의 은밀한 추억 내가 처음 시작된 그곳 분홍 꽃 팬티에 감추고 사는 어머니, 여자라는 사실 알았다 어느 호래자식이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했나 성(性)을 초월하는 거룩한 존재라고 사탕발림을 했나 칠순을 넘겨도 팔순을 넘겨도 감추고 싶은 곳이 있다면 세상 모든 어머니는 여자다 분홍 꽃 팬티를 입고 사는 내 어머니의 여자는 여전히 핑크빛 무드 그 여자 손빨래하면서 내 얼굴 같은 색깔로 분홍 꽃물 드는데
시인은 이 대목에서 “어머니가 여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어머니가 병석에 오래 누웠다가 마당으로 나와서 빨간 양앵두 몇 알을 따 입에 넣고 “아, 시다 시”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는 ‘아, 시(詩)다 시(詩)’라는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머니 계셔 시인이 되었고/ 어머니 말씀 받아 시를 쓴다”는 구절이 정말로 그냥 나온 게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연 마지막에 그는 “오늘 제가 잡은 주제는 ‘무엇이 우리를 시인으로 만드는가’였는데 그에 대한 답을 내겠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시인으로 만드셨습니다”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대학생 때 시인이 되어 42년간 시를 써 오면서 시집을 14권 내고 15번째, 16번째 시집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지금까지 그를 낳고 키운 시의 자양분이 대부분 어머니의 탯말에서 나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자리였습니다.
그동안 그가 쓴 시가 2000편이 넘는데 그 토양을 이렇게 비옥하게 하고 특별한 꽃까지 피워 올린 힘이 곧 어머니였으니, 어머니를 꽃밭에 모신 ‘꽃장’의 웅숭깊은 뜻도 비로소 알 것 같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