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화의 매트릭스로 보는 세상] 한류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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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오래 쌓인 ‘운영의 기억’이 만든 장기 전망
오래 쌓인 ‘운영의 기억’이 만든 장기 전망
1. 미디어의 뿌리: 동시성의 경험을 길게 키웠다
라디오 합창, 공개홀 오디션, 주말 음악프로의 ‘전국 동시 시청’은 오래된 훈련장이다.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은 노래를 듣고, 다음 날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 이 동시성은 디지털로 이행하며 팬덤의 동시 행동(스트리밍 파티, 해시태그 운동, 응원법)으로 옮겨붙었다. 플랫폼이 새로워져도, ‘함께 본다’는 습관은 이미 한국 대중의 몸에 깔려 있었다. 지금의 글로벌 떼창과 실시간 역주행은 이 오래된 동시성 인프라의 현대적 버전이다.
2. 팀으로 만드는 법: 공장과 실험실의 공존
아이돌 시스템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공정이 아니다. 방송국 전속가수, 기획·작곡 캠프, 안무·편곡 스튜디오, 투어 제작사가 분업–연결–개선을 거듭하며 다듬어 온 결과다. 표준화(퀄리티 관리)와 실험(콘셉트 갱신)을 동시에 굴리는 법을 오래 배웠다. 그래서 장르·언어·멤버 구성이 바뀌어도 완성도의 하한선이 유지된다. 축적된 운영 능력이 ‘한 번 뜨고 끝’이 되지 않게 잡아준다.
3. 번역의 역사: 접근성을 꾸준히 확장했다
자막의 나라라는 말처럼, 한국 대중은 외화·애니·드라마를 자막으로 소비하는 훈련을 오래 해왔다. 이 습관은 역으로 한국 콘텐츠의 해외 확산에 최적화된 감각을 만들었다. 다국어 자막, 자막 톤의 미세 조절, 모바일 화면비 최적화, 라이브 동시중계 등은 갑작스런 발명이 아니라 축적된 번역·접근성 노하우의 연장선이다. 처음 보는 관객도 쉽게 들어오게 하는 문턱 낮추기는 한류가 오랫동안 줄곧 밀어온 방향이었다.
4. 혼종의 미감: ‘절제된 바탕+한 방의 포인트’
전통과 팝, 로컬과 글로벌을 섞어도 어지럽지 않은 이유가 있다. 드라마·무대·패션·뷰티에서 한국은 깔끔한 기본값 위에 강한 강조 한 지점을 얹는 디자인을 오래 연습해 왔다. 보는 법을 알기에, 새것을 얹어도 가독성이 유지된다. 이 혼종의 미감이야말로 ‘낯선데 따라 부를 수 있는’ 한류의 정체를 지켜 온 보호막이다. 새 얼굴, 새 사운드가 나올 때마다 관객이 금방 길을 찾는 이유다.
5. 공공과 민간의 공진화: 인프라가 체력을 만든다
해외진출 펀딩, 저작권 제도 정비, 공연장·스튜디오 인프라 확충은 단기간 성과로 환산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베이스가 있었기에, 위기 때도 전환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외환위기, 플랫폼 전환, 팬덤 문화의 변화—매번 충격은 있었지만, 생태계가 통째로 무너지지 않은 건 공공–민간의 긴 호흡 투자 덕분이다. 장기전에서 체력은 곧 신뢰다.
6. 실패에서 배우는 루프: 빠르게 사과하고 더 빠르게 수정
한류는 논란과 실수에서 피드백–수정–재발 방지의 루프를 비교적 빠르게 돌려 왔다. 표상·의상·번역 이슈에 사과·패치·가이드라인 고도화가 뒤따랐다. 문화 교류는 예민하다. 다만 실수가 곧 파국이 되지 않는 건, 축적된 매뉴얼과 학습의 속도가 있기 때문이다. 학습이 쌓이면 파장은 줄고, 다음 시도는 더 정교해진다.
7. 지역과 일상의 확장: 콘텐츠가 공간을 바꿨다
콘서트·페스티벌·로케이션은 도시의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공연 표를 사는 행위가 여행·상권·공공교통과 연결되고, 드라마 한 장면이 지역의 체험 코스로 변한다. 콘텐츠→장소→생활로 이어지는 확장 경로가 이미 만들어졌다는 건, 개별 히트가 사라져도 생태계가 스스로 순환할 수 있음을 뜻한다. 유행이 사라져도, 생활은 남는다.
한류의 현재는 화려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과거가 단단했다는 사실이다. 동시성의 경험, 팀 기반 제작, 번역과 접근성의 집착, 혼종 미감의 훈련, 인프라에 대한 꾸준한 투자, 빠른 학습의 루프, 도시와 일상으로의 확장—이 느리고 지루한 축적이 오늘의 파도를 만들었다.
그래서 한류는 거품이 아니다. 파도처럼 오르내릴 수는 있어도, 해류처럼 흐른다. 유행은 한순간 타오르고 꺼지지만, 축적은 방향을 만든다. “앞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하느냐”보다 먼저, “여기까지 어떻게 와 있었느냐”를 기억할 때, 우리는 한류의 다음 10년을 예측할 수 있다. 이미 그렇게 오랫동안 걸어왔기 때문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홍재화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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