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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란의 시대'를 뚫고 자신만의 신화를 쓴 흑진주, 조세핀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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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e] 박마린의 유럽 클래식 산책

    조세핀 베이커(Josephine Baker)
    무대 위의 스타, 자유와 평등의 아이콘
    1920년대,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는 ‘광란의 시대’라 불리며, 삶에 대한 갈망과 창의적 열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끓어오르던 시기였다. 1906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조세핀 베이커는 광란의 시대의 파리 무대에서 이국적이고 파격적인 춤과 노래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흑진주’, ‘브론즈 비너스’라 불리던 스타이다. 특히 백 년 전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바나나를 허리에 두르고 관능적인 춤을 선보인 그녀의 모습은 시대의 자유와 도발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히 무대 위의 스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그녀는 외교 여권과 악보 속에 암호문을 숨겨 운반하는 등 목숨을 걸고 저항 운동에 기여했다. 전쟁 후에는 인권과 평등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고, 마틴 루터 킹이 주도한 <워싱턴 대행진(1963)>에서도 연설하며 미국 내 인종차별에 공개적으로 맞섰다.

    사생활에서도 그녀는 ‘무지개 부족’이라 불린 12명의 입양아를 양육함으로써,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화합할 수 있음을 가족의 형태로 증명해 보였다. 1975년, 파리에서 열린 화려한 회고 공연 직후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삶은 예술가, 저항가, 인도주의자로서 오늘까지 빛나고 있다. 조세핀 베이커는 2021년 프랑스에서 흑인 여성 최초로 팡테옹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이는 그녀가 추구했던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기리는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세핀 베이커(Josephine Baker) / 사진. 한경DB
    조세핀 베이커(Josephine Baker) / 사진. 한경DB
    샹젤리제 무대에 부활한 아이콘, 조세핀 베이커

    10월 4일 샹젤리제 극장(Théâtre des Champs-Élysées)에서 마련된 갈라 콘서트는, 단순히 조세핀 베이커의 삶을 되짚어 보는 전기적 회고를 넘어서, 한 여성의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초상화를 감성적이고 서사적으로 그려낸 무대로 기억된다. 화려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조세핀 베이커는 그에 머무르지 않고 레지스탕스로 활동했으며, 투지를 발휘하여 인권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번 갈라 콘서트는, 시대를 초월한 뮤즈이자 ‘무지개 부족’의 어머니로 불리며 다양한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던 조세핀 베이커의 다양한 면모들을 만화경처럼 제시했다.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 출연

    일드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크리스토퍼 오스틴(Christopher Austin, 음악 감독)이 지휘와 편곡을 맡아 무대를 이끌었다. 솔리스트로는 소프라노 프리티 옌데(Pretty Yende), 노래와 피아노를 겸한 루안 포미에(Luan Pommier), 뮤지컬 배우 네이마 나우리(Neïma Naouri)가 참여했다. 어메이징 키스톤 빅 밴드(The Amazing Keystone Big Band)와 트럼펫 주자 다비드 엔코(David Enhco)의 재즈적 색채 또한 이번 무대에 크게 기여했다. 어린이 합창과 무용수들의 출연은 무대에 한층 생기를 더했고, 조세핀 키르슈(Joséphine Kirch)의 무대 연출 및 드라마투르기, 위베르 바레르(Hubert Barrère)가 맡은 의상 또한 극적 전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이렇듯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와 제작진이 참여한 이번 갈라는, 결코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았던 조세핀 베이커라는 인물이 지녔던 다양한 정체성을 충실히 반영했다.
    조세핀 키르슈가 디자인한 무대 위 여러 아티스트들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 사진. © Jean-Philippe Raibaud
    조세핀 키르슈가 디자인한 무대 위 여러 아티스트들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 사진. © Jean-Philippe Raibaud
    네 가지 변주로 엮은 삶의 초상

    갈라 콘서트는 4막으로 나뉘어 조세핀 베이커의 다채로운 삶을 무대 위에 그려냈다. 1920년대 파리의 카바레에서 자유롭고 도발적인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젊은 아티스트의 모습을 시작으로, 음악은 ‘광란의 시대’를 향해 힘차게 뻗어나갔다. <J’ai deux amours>와 거슈윈(George Gershwin)의 <An American in Paris>는, 소프라노 프리티 옌데(Pretty Yende)의 우아하고 넉넉한 성량으로 샹젤리제 극장의 객석을 재즈적 활기로 물들였다.

    이어지는 장면은 조세핀 베이커의 또 다른 면모를 그려냈다. 네이마 나우리(Neïma Naouri)가 부른 <J’attendrai>와 루안 포미에(Luan Pommier)가 부른 <Quand je pense à ça>는, 레지스탕스이자 인권 운동가였던 베이커의 용기와 신념을 절실히 표현했다. 사티(Érik Satie)와 리스트(Franz Liszt)의 선율 위에 울려 퍼진 조세핀 베이커의 정치·윤리적 메시지 또한 샹젤리제 극장의 청중들에게 간절한 울림을 남겼다.
    프리티 옌데(Pretty Yende) 공연 모습 / 사진. © Jean-Philippe Raibaud
    프리티 옌데(Pretty Yende) 공연 모습 / 사진. © Jean-Philippe Raibaud
    세 번째 장면에서는 세계적 아이콘이었던 그녀의 모습이 찬란하게 그려졌다. 거슈윈의 <The Man I Love>를 비롯한 재즈 타이틀과 뮤지컬 Girl Crazy의 서곡은, 당대의 화려함과 베이커가 지닌 예술적 영감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한 가족으로 화합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담은 ‘무지개 부족(Tribu arc-en-ciel)’의 이상은, 라벨(Maurice Ravel)의 <Ma Mère l’Oye>와 베이커가 직접 가사에 참여한 <Dans mon village>, 그리고 루안 포미에의 신작 <Ba-Y Lavwa>를 통해 그려졌다.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의 <Somewhere>는 베이커의 이상향으로, 에필로그의 <Demain>은 미래를 향한 희망으로 그려지며 마지막 장면이 마무리되었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행진(Marche sur Washington)에서 베이커가 전했던 메시지를 환기시킨 부분이었다.

    “오늘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저는 긴 세월을 살아왔고 이제 예순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함께 뵙게 된 것은 제게 큰 위로이자 기쁨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의 민족처럼 굳게 뭉쳐 있습니다. 단결 없이는 승리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완전한 승리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멈추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결코 틀릴 수 없습니다. 세상은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프리티 옌데(Pretty Yende) 공연 모습 / 사진. © Jean-Philippe Raibaud
    프리티 옌데(Pretty Yende) 공연 모습 / 사진. © Jean-Philippe Raibaud
    조세핀 베이커의 당시 모습이 담긴 영상과 함께 소개된 이 메시지는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테마였다.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목숨을 걸어 싸웠고, 미국 내 인종차별과 맞서며 인권의 전선에 서서 발언했던 조세핀 베이커의 목소리는 오늘날까지도 호소력 있게 심금을 울렸다.

    재즈와 클래식, 심포닉 오케스트라와 빅밴드가 어우러진 무대 위에서 어린이 합창과 성인 솔리스트들의 목소리가 함께 울려 퍼졌다. 무용과 영상 아카이브의 결합은 조세핀 베이커가 평생 넘나들었던 ‘경계’를 생생히 재현했으며, 다이내믹한 무대는 그녀의 예술과 삶이 지녔던 국경 초월적 성격을 증언했다. 한밤의 카바레에서 레지스탕스의 은밀한 서신에 이르기까지, 조세핀 베이커는 시대와 장르의 경계를 과감히 넘어섰다. 이번 갈라는 결국 관객에게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다 — 더 열린 세상, 더 정의롭고, 더 생기 있는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파리=박마린 칼럼니스트

    [조세핀 베이커 오마주 갈라 콘서트 | 샹젤리제 극장 제공. © Jean-Philippe Raiba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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