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막을 내린 키아프(Kiaf·한국국제아트페어) 서울 현장에서 유독 발길을 오래 붙잡은 한 작품이 있다. 사람들은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다양한 각도로 프레임 속의 인물들을 바라봤다.벽에 고정된 조각이지만 보는 사람의 시선을 따라 계속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져서다. 이 작품은 이용덕 작가의 ‘역상조각(Inverted Sculpture)’이다.
이용덕, laugh 055582, 2005, 230x122x40cm. /이용덕
흔히 아는 조각은 입체적이다. 표면에 물질을 붙여가며 양각의 형태를 완성하기 때문. 하지만 이용덕 작가의 역상조각은 안쪽을 오목하게 파고 들어간 음각의 모습이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사에 역상 조각이라는 영역을 구축해 조각 역사의 새로운 실험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음과 양의 조화’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1984년부터 오목하게 파인 조각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당시 많은 작가들이 선보인 미니멀한 작품 사조에 편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 오래 전부터 사람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역상 조각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 역상조각을 세상에 내놓았을 당시에는 이전 미술사에는 없던 방식에 대중을 비롯한 많은 평론가들은 낯설어 하며 코멘트를 주저해 초반에는 크게 관심을 받지 못 했다고.
이용덕, Synchronicity, 2018, Synchronicity, 105x235x30-4pcs. /이용덕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쌓아온 그의 역상 조각 화업이 미국 뉴욕에서 빛을 발한다. 오는 10월 2일 작가의 역상조각이 처음으로 뉴욕 땅을 밟는 것. 첼시 중심부에 자리잡은 에이피 스페이스 갤러리(Gallery AP Space)에서 전시를 연다. 200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표갤러리에서 진행한 전시 이후 미국에서의 개인전은 두 번째, 뉴욕에서는 최초로 진행하는 개인전이다.
뉴욕 전시에 앞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용덕 작가는 소감을 전했다. “홍콩이나 독일 등 유수의 아트페어에 참여하고, 벨기에와 호주 등 유럽이나 아시아 지역에서는 다수의 전시를 개최했지만 이상하게도 그간 뉴욕과는 연이 닿질 않았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뉴욕 아트 씬에 역상조각을 제대로 소개하고 K-아트를 확산하는 기회로 삼고 싶습니다“
이용덕, Encounter-Submission, 2014, 440x260x230cm. /이용덕
그가 작업하는 역상조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대표적인 것이 부조처럼 표면을 파고 들어간 작업이지만, 철판을 쌓아 실루엣을 만드는 형식과 원형의 방에 빛을 비춰 만들어지는 그림자로 선보이는 작업도 있다. 특히 그림자 작업은 관객이 직접 작품에 참여할 수 있어 몰입도가 높다. 직경 6m 정도의 원형 방에 들어간 사람을 서치라이트가 비추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참여 관객들은 그림자에 자신의 존재를 이입하며 작품에 집중하게 된다.
작가는 관객에 의해 비로소 그의 작품이 완성된다고 표현했다. “현대미술은 보통 ‘무엇을 말하는지’ 그 이슈에 집중하지만 저는 주제를 최소화하고 작품을 ‘어떻게 표현할까’와 같은 형식을 고민합니다. 형식을 통해 관객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스스로 그 가치를 찾고 향유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죠.”
서울 용산역 광장 로카우스 호텔 앞에 자리잡은 공공미술 작품 위대한 결집, 7250x3750x4900cm, 스테인리스 스틸, 도색, 2023. /이용덕
그의 작품을 본 관람객은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사람이 있다가 나갔네!”라며 신기해하는 아이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떠올리던 독일의 노신사, 작품 ‘마더’를 보고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며 눈물짓던 여성까지 작가는 관람객과의 일화를 설명하며 그의 작품과 관람객이 맺는 관계를 설명했다. “저는 작품이 사람들에게 '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철학적 명제를 깨닫고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고 시각적인 재미에서 즐거움을 경험하는 분도 있죠. 저는 그저 사람들이 놀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와서 저마다의 쾌를 찾아갈 수 있도록요,”
40여년에 걸친 이용덕 작가의 화업을 담아 발간한 아트북. /이용덕
이용덕 작가는 역상조각 이전에 공공미술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해 왔다. 남산에 자리잡은 안중근기념관의 ‘안중근 의사상’과 서울 동작구 삼일공원의 ‘유관순 열사상’, 명동성당의 ‘김수환 추기경상’ & ‘프란치스코 교황상’, 용산 로카우스 호텔 앞의 ‘위대한 결집’ 등 유수의 공공 조형물을 남기며 그 이름을 알렸다.
뉴욕 첫 개인전과 맞춰 그간의 화업을 담은 아트북도 발간했다. 심상용, 최태만, 원애경 등 10명의 전문가가 작가의 조형 세계와 창작개념을 심층적으로 접근한 글들을 모아 엮었다. 작가의 뉴욕 전시는 11월 1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