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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으로 듣는 영화 ‘지옥’ 개봉, 주연은 서울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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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서울시향 신작 공연 리뷰
    작곡가 정재일이 쓴 '인페르노' 초연
    쌓아올린 현악에 묵직한 저음 더해
    브람스 교향곡 1번에선 밀도 높은 소리
    서울시향 다음 달 27일 카네기홀 공연
    “살아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게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겁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 / 사진출처. 서울시립교향악단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 / 사진출처. 서울시립교향악단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여행자 마르코 폴로는 황제인 쿠빌라이 칸에게 이렇게 말한다. 폴로가 말하는 지옥 탈출법은 두 가지. 하나는 지옥을 받아들여 지옥과 일부분이 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지옥 속에서 지옥 같지 않은 걸 찾아내 이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두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으로 유명한 작곡가 정재일이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썼다. 작곡 아이디어는 소설 속 마르코 폴로의 말에서 따왔다. 기생충으로 일상 공간에 담긴 자본주의 계급도를 그려내고, 오징어 게임으로 죽음과 탐욕 사이에 갖힌 인물들을 음악으로 묘사했던 그가 이번엔 지옥을 그렸다. 얍 판 츠베덴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은 감독직 부임 1년 전인 2023년 1월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위촉곡 작곡을 주저하던 정재일은 “자신의 스토리를 풀어가면 된다”는 츠베덴 감독의 말에 서울시향을 위한 곡을 썼다.

    지옥에서 만난 평안, 그 주변엔 불 폭풍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 공연은 정재일이 쓴 곡 ‘인페르노’가 처음 연주되는 자리였다. 인페르노는 불바다를 뜻한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을 가리키기도 한다. 정재일의 지옥은 4개 악장에 18분 길이. 악단은 1악장을 시작하자마자 강렬하고 웅장한 현과 금관의 소리로 기선을 제압했다. 지옥문이 우뚝 솟아 저승에 들어온 영혼들을 굽어보는 인상이었다. 이어 맑지만 차가운 차임벨 소리가 서슬퍼런 칼날을 든 망나니처럼 관객들의 귓가를 맴돌았다. 튜바, 바순, 베이스가 묵직한 저음을 쌓아 올릴 땐 지옥의 군대가 이승 침공을 위해 집결한 듯했다.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에서 작곡가 정재일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출처. 서울시립교향악단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에서 작곡가 정재일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출처. 서울시립교향악단
    정재일은 그간 영상을 보고 음악을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이 영상을 음악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면 인페르노는 음악이 마음 속 영상으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2악장에서 현악기 소리가 층층이 쌓일 땐 지옥의 무게감이 관객을 짓눌렀다. 글로켄슈필과 실로폰의 통통거림은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한 영혼들이 토해내는 단말마 같았다. 격정적인 2악장이 끝나자 클라리넷이 평온한 멜로디를 들려주는 3악장이 이어졌다. 하지만 클라리넷의 따뜻함에서 안녕을 바라기엔 주변이 무시무시했다. 현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이곳이 지옥 어딘가임을 계속 상기시켰다. 지옥에서 평안을 구하려 하면 주변에 그려진 지옥들을 감수해야 했다. 폭풍의 눈 밑에서 눈을 감고 홍차를 마시는 상황이었다.

    4악장에서도 고요한 분위기는 계속됐지만 두 음을 반복하는 현 소리들이 불안감을 줬다. 점점 몰아치는 타악기 소리들이 무너지며 음악이 끝나자 지옥 속에서 평화를 찾은 듯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다만 그 평화가 지옥이 익숙해져서인지, 지옥에서 지옥 같지 않은 걸 간직하게 돼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음악은 균형감 있게 다양한 악기들을 배치하거나 음량 조절에 세밀한 변화를 준 쪽은 아니었다. 겹겹이 쌓은 소리들을 배경으로 삼아 만든 이미지로 이야기를 만들어낸 쪽에 가까웠다. 츠베덴 감독의 손길에 무대로 올라온 정재일은 90도 인사로 관객들의 박수에 답례했다. 정재일이 악단과 협업을 계속하면서 어떤 음악을 보여줄 지가 기대되는 자리였다.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에서 협연한 피아니스트 박재홍. / 사진출처. 서울시립교향악단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에서 협연한 피아니스트 박재홍. / 사진출처. 서울시립교향악단
    서정성과 또렷함 함께 살린 박재홍

    다음 무대는 서울시향과 피아니스트 박재홍의 협연이었다.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피아노와 악단이 자극적인 멜로디를 주고 받으며 화려함을 선사하는 곡이다. 시작은 완전히 매끄럽진 않았다. 악단이 내는 강렬한 소리에 피아노 소리가 이따금 묻혔다. 악단이 뚜렷한 유채화를 그리고 있는데 피아노가 섬세한 수채화로 덧칠을 하는 쪽에 가까웠다. 곡의 흐름이 차분해진 중반부부터는 소리의 온도가 서로 비슷해졌다. 서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또렷함을 지켜나가는 박재홍의 연주에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피아니스트가 긴장을 풀고 숨을 내쉴 땐 관객들도 공명하듯 긴 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를 “올드스쿨”로 부르는 박재홍답게 지나치거나 과한 느낌 없이 서정성을 살린 연주였다.

    2부는 브람스 교향곡 1번이었다. 서울시향은 전반적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며 탱탱한 고무줄처럼 1악장을 탄력 있게 이끌었다. 현들의 응집력도 뛰어났다. 평화로운 분위기의 2악장에선 오보에의 섬세한 호흡 조절이 돋보였다. 클라리넷, 플룻도 바이올린과 어우러지며 완성도 높은 음악을 보여줬다. 바이올린 악장인 웨인 린의 연주는 다른 단원들의 연주에 감칠 맛을 더하는 양념이었다. 4악장은 서울시향의 매력을 만끽하는 무대였다. 지난해부터 츠베덴 감독과 합을 맞춰온 단원들은 꽉 차고 힘 있는 소리로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였다.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에서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과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출처. 서울시립교향악단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에서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과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출처. 서울시립교향악단
    서울시향은 이날 선보인 레퍼토리를 다음 달 27일부터 시작하는 미국 투어에서도 선보인다. 인페르노를 뉴욕 카네기홀, 스틸워터 맥나이트센터 등에서 연주한다. 다음 달 30일과 11월 1일 맥나이트센터 공연에선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와 브람스 교향곡 1번도 함께 들려준다. 10월 27일 카네기홀, 30일 맥나이트센터 공연에선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와 협연한다. 서울시향은 김봄소리와 다음 달 1·2일 예술의전당에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미리 합을 맞춘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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