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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음의 미학, 빈티지 오디오가 말하는 '와비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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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e] 코난의 맛있는 오디오

    불완전 속의 아름다움과
    지속가능한 디자인 철학을 보여주는 오디오

    허름한 공간의 빈티지 스피커가
    최신 하이엔드보다 더 감동적인 경험을 주는 순간
    와비사비

    때론 허름한 담벼락의 모양이나 개발에 밀려난 오래된 구시가지의 낡은 건축물에서 뭔지 모를 감흥을 느낄 때가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또는 조형적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모두가 화려한 디자인과 값비싼 외형을 뒤집어쓰고 있는 현대적 디자인으로 둘러싸인 요즘 오히려 이런 낡고 오래된 것들이 주는 감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일단 놀라움이다. 겉은 초라해 보이지만 혜안으로 바라보면 그 속에 아름다운 질서와 창조적 아이디어가 묻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한마디로 표현해달라는 질문에 디터 람스가 말한 ‘와비사비’는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 지금은 미학의 의미를 넘어 안분지족하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 의미로 확장된 단어지만, 본질적으로 “불완전 속에서 찾은 아름다움”, “훌륭한 상태에 대한 열등한 상태” 등을 뜻한다. 조잡하고 간소하지만, 그 자체로 평온하고 간결하며 전체적으로 균형을 내재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경제적 수치로 환원할 수 없는, 덜 완벽하지만 그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충만한 가치. 애플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가 디터 람스의 오래되고 낡은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실토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산업 디자이너 디터 람스
    산업 디자이너 디터 람스
    디터 람스의 디자인
    디터 람스의 디자인
    하이파이 오디오에서도 종종 이런 ‘와비사비’ 같은 단어를 떠올릴 때가 있다. 최신 설계와 화려한 디자인으로 치장하고 있는 현대 하이파이 스피커를 듣다가 허름한 선술집 천장에 매달린 오래되고 무뚝뚝해 보이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에 더 감동하는 경험들 말이다. 종종 찾은 어느 음악 바에서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빈티지 스피커가 수천, 수억 원대 최신 스피커보다 덜 감동적이라고 말할 순 없어 쭈뼛하곤 했다.

    여기저기 남루한 외관을 한 빈티지 스피커들에서 나름의 감흥을 얻는 것은 그것이 현재 스피커들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태가 온전하다는 가정하에 얼마 전 들었던 독일 텔레풍켄의 비오노르나 JBL의 파라곤이 그런 경우다. 당시 스피커를 듣다 보면 요즘 일부 스피커들은 그 당시 활활 타오르던 음악과 음질에 대한 열망의 상업적 이미테이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곤 하니까.
    JBL Paragon
    JBL Paragon
    하지만 종종 요즘 출시되는 오디오 중에서도 와비사비 같은 단어를 떠오르게 만드는 제품들이 있다. 오랜 시간의 더께가 쌓여 있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는 다락방 어느 한켠에 마치 새것 같은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던 기기를 꺼내드는 느낌이랄까? 사용하지 않은, 오랜 숙성의 기간을 거친 듯한 디자인으로 눈과 귀를 번쩍 뜨이게 만드는 것들이다.

    레벤 CS300X, CS600X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레벤 CS300X와 CS600X라는 제품이다. 마치 아우와 형 같은 두 개의 진공관 앰프는 처음 본 순간 소유욕이 생길 정도로 오랜 빈티지 제품의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왔다. 레벤은 일본 브랜드로 오랫동안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진공관 앰프를 만들어왔다. 일본은 이런 브랜드가 많다. 접시 하나, 젓가락 하나도 장인들이 가업을 이어받으면 만들어낸다. 휘황찬란한 디자인의 메이저 하이엔드 진공관 앰프에 비해서는 마치 빈티지 앰프처럼 보인다.

    지금 시점에선 노브의 모양이나 전면 패널 디자인을 더 정교하게 날카롭게 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종종 이렇게 조금 덜 완성된 듯, 도자기를 굽듯 사람의 손으로 매만진 듯한 모습이 좋다. 음질 경향도 인간적인 냄새가 폴폴 풍겨서 따뜻한 온기와 촉촉한 중고역이 일품이다. 하베스, 스펜더, 그라함 같은 영국 스피커와 매칭도 훌륭하다.
    레벤 CS600X
    레벤 CS600X
    네임오디오 Nait 50

    전통적인 하이파이 오디오의 강호 영국도 빼놓을 수 없다. 위에 언급한 BBC 방송국 모니터의 모태부터 시작해 다부진 형태의 콤팩트 디자인은 영국 오디오 디자인의 시그니처다. 여기서 네임오디오의 Nait 50이 생각난다. 1973년, 친구가 연주한 녹음의 재생음이 마음에 안 들어 앰프 제작을 시작했다는 줄리안 베레커의 브랜드. Nait 50은 바로 그가 1983년에 출시했던 Nait 1에 대한 오마주로 2023년에 재출시한 것이다.

    디자인은 오리지널 모델을 그대로 빼닮았다. 크롬 범퍼에 검은색 도시락 같은 디자인은 지금 봐도 클래시컬하면서 동시에 개구쟁이 친구 같은 면이 있다. 요즘 네임 오디오 디자인은 전면엔 화려한 디스플레이와 세련된 휠 설계 등으로 사랑받지만, 네임오디오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로 이런 디자인이다. 처음 보면 작고 볼품없고, 게다가 거무튀튀하며 무심한 듯한 디자인이다. 하지만 그 작은 몸체에서 나오는 당당하고 리드미컬한 소리를 경험하면 이 작은 사이즈의 앰프에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온다.
    네임오디오 NAIT 50
    네임오디오 NAIT 50
    레가 Planar 3 Eco Special

    ‘에코’라고 하면 누구나 환경 보호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레가 턴테이블에 붙은 ‘에코’는 과연 무슨 의미일까? 레가는 ‘Green Grade’라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친환경 턴테이블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친환경이라는 것이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관상 아주 약간의 흠집이 있는 경우 폐기처분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사용상 전혀 문제가 없는 부품들을 버리지 않고 재활용해 에코 버전 턴테이블을 출시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상태의 신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약간의, 작은 결함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덜 완벽하지만 그 자체로 충만한 상태인 것이다.
    레가 PL3 ECO Special
    레가 PL3 ECO Special
    제네렉 RAW

    핀란드하면 떠오르는 오디오 메이커는 제네렉이다. 영, 미권이나 독일 등지의 스튜디오 모니터와 거의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브랜드가 아닐까? 액티브 모니터의 대표 주자 중 하나로 유명 스튜디오에서 사용 중인데 2020년에 특별한 제품군 RAW 라인업으로 스피커들을 내놓았다. 마치 누드 콘크리트를 연상시키는 캐비닛 표면은 재활용 알루미늄이다. 이 또한 재활용을 통해 알루미늄, 마감용 수지 등의 낭비를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종전의 제네렉은 하얀색이나 회색 톤으로 깔끔하게 마감된 공산품 느낌이라면 RAW 에디션은 코팅 없이 날것의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예전 같으면 만들다 만 듯해서 싫어할지도 모르겠지만 재활용, 환경 보호라는 기치가 더해지면서 맥락이 달라졌다. 은은한 메탈릭 회색 톤은 그 자체로 근본적이며 원초적인 매력이 있다. 더불어 공산품이 아닌 수공품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참고로 제네렉 디자인은 하리 코스키넨(Harri Koskinen)과 협력해서 만들어졌다. 핀란드 출신인 그는 미니멀리즘과 기능성을 강조한 디자인 철학으로 핀란드에서 유명하다. 모두 와비사비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제네렉 RAW
    제네렉 RAW
    환경 보호 캠페인이 가장 활성화되어 있는 유럽엔 이러한 재활용 제품들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옷이며 신발 또한 백화점에 따로 빈티지 코너가 있을 정도고 국내에도 도입되고 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지금 구매하세요 : 쇼핑의 음모’를 보면 아마존을 비롯해 신발, 의류 브랜드가 어떻게 상품을 만들어 구입을 유도하고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버리고 새 제품을 구입하게 만들 것인지 알 수 있다. 고령화, 저성장으로 가고 있는 시대에 온갖 자원을 아낌없이 투입하며 재활용은 안중에도 없는 브랜드는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할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와비사비는 그 디자인 철학 자체로 환경보호와 뜻이 맞닿아 있다. 그 어떤 시대보다도 디자인과 그 활용을 고민해볼 때다.

    오디오 평론가 코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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