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 전통을 고수하는 '황금 홀의 악단', 엑설런스는 그들의 일상

최근 새롭게 단장한 샹젤리제 극장이 새로이 부임한 극장 감독 바티스트 샤루엥(Baptiste Charroing)과 함께 새 출발을 선언했다. 전통과 권위를 유지하되 더욱 개방적인 공간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샹젤리제 극장은 오페라, 콘서트, 무용 등 폭넓은 장르를 아우르는 한편, 여성 예술가와 동시대 창작에 문을 열고 관객에게는 공연 그 이상의 경험을 선사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새롭게 단장한 홀과 아트리움, 그리고 아티스트와의 만남, 전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 속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샹젤리제 극장은 빈 필과 뮌헨 필의 교향악으로 이번 시즌의 성대한 막을 올렸다.

1842년 창단된 빈 필하모닉, 그들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더불어 세계 최고 악단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해마다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신년 음악회의 밝고 경쾌한 사운드로 우리에게 익숙한 그들은 빈의 황금 홀과 국립 오페라 극장을 넘나들며 연중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주한다. 이렇듯 빈의 터줏대감 자리를 고수해온 빈 필하모닉은 시대적 조류에 섣불리 타협하지 않는 전통의 수호자이다. 단원들이 스스로 지휘자를 선발하고 직접 프로그램을 짜는 것을 비롯하여 악단 멤버 영입, 솔리스트 초빙 등의 중대한 사안들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등 빈 필의 자발적 경영은 널리 알려져 있다.

빈 필하모닉 입단 자격은 빈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최소 3년 이상의 연주 경험을 지닌, 충분히 검증된 연주자에게만 주어진다. 특히 상임 지휘자를 두지 않고 단원들이 직접 객원 지휘자를 선정하는 운영 방식은 이 악단만의 독보적인 특징이다. 최고 악단의 자존심은 철저한 이미지 관리에서도 드러난다. 단원들은 엄격한 연미복 차림을 고수하고, 공연 사진 촬영도 자체 기준안에서 이루어진다. 오랫동안 오스트리아 출신 연주자 중심의 보수적 전통을 유지해왔으나, 최근 여성 연주자와 외국인 출신 연주자도 단원들 중에 포함되는 등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9월 10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열린 빈 필하모닉 공연. 프란츠 뵐저-뫼스트가 지휘를 맡았다. / 사진. ⓒ 샹젤리제 극장
지난 9월 10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열린 빈 필하모닉 공연. 프란츠 뵐저-뫼스트가 지휘를 맡았다. / 사진. ⓒ 샹젤리제 극장
해마다 어김없이 파리를 찾는 빈 필하모닉이 올해도 샹젤리제 극장 2025-2026시즌 개막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랐다. 30년째 파리에서 연주를 이어온 만큼 샹젤리제 극장은 이들에게 낯선 공간이 아니지만, 시즌 개막은 여전히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에 빈 필은 오스트리아 지휘자 프란츠 벨저-뫼스트와 함께 모차르트와 차이콥스키 프로그램으로 파리 관객과 만났다. 얼마 전 런던의 프롬스를 모델로 폭넓은 관객층을 적극 유치한 파리 필하모니의 개막 풍경과 달리, 샹젤리제 극장의 교향악 개막은 빈 필의 무대를 통해 절제된 품격과 전통을 전면에 내세웠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38번 <프라하>는 절제된 균형미와 극적인 뉘앙스가 일품이다. 드라이한 연주홀의 아쉬운 공명에도 불구하고 빈 필 특유의 밝고 명료한 사운드는 건재했으며, 치밀하고 단정한 앙상블은 무결점의 연주 그 자체였다. 해마다 조금씩 늘어나는 여성 단원들의 숫자도 인상적이다. 올해는 무대에 오른 백여 명 중 열네 명이 여성으로, 목관에 두 명, 현악 파트에 열두 명이 포진했다. 보수적인 그들의 전통 속에서도 변화를 향한 꿈틀거림이 감지되는 부분이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에서는 연중 오페라 무대에 익숙한 오케스트라답게 직설적이면서도 서정적인 화법으로 드라마와 음악적 완결성을 동시에 담아냈다. 글리산도의 섬세한 처리, 완전한 음정으로 맞춰낸 현악 유니즌의 서정성, 급경사 다이내믹을 흔들림 없이 소화했고, 빠른 속도감은 청중에게 박진감을 더했다. 금관 특히 빈 호른의 중후하고 두터운 사운드는 그들의 사운드 정체성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다층적인 레이어가 풍부하게 살아 있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은 격정과 고뇌의 드라마를 극대화하며, 빈 필하모닉이 왜 여전히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지켜가는지를 다시금 증명했다. ‘엑설런스(excellence)’라는 단어가 이 악단에게는 단순한 수식이 아닌 빈 필 일상의 정의라는 사실을, 파리 애호가들은 재차 실감했다.
사진. ⓒ 샹젤리제 극장
사진. ⓒ 샹젤리제 극장
빈 필하모닉과 프란츠 뵐저-뫼스트가 공연 직후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 ⓒ 박마린
빈 필하모닉과 프란츠 뵐저-뫼스트가 공연 직후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 ⓒ 박마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품위를 지킨 무대,
뮌헨 필과 라하브 샤니
독일의 전통 명문 악단, 그리고 젊은 거장의 등장


2025-2026시즌 교향악 시리즈의 두 번째 무대는 뮌헨 필하모닉과 라하브 샤니가 맡았다. 이들의 파리 공연은 시작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애초 벨기에 플랑드르 페스티벌에서 같은 프로그램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지휘자가 이스라엘 출신이라는 점을 이유로 한 주최 측의 취소로 무산된 것. 이에 샹젤리제 극장과 총감독 바티스트 샤루엥은 9월 16일 파리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임을 확인하며, 라하브 샤니와 뮌헨 필 전체에 지지를 표명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교향악단 중 하나인 뮌헨 필하모닉은 풍부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세르주 첼리비다케, 제임스 레빈, 크리스티안 틸레만, 로린 마젤, 발레리 게르기예프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거장 지휘자들이 이 악단을 이끌어왔으며, 2026년부터는 젊은 이스라엘 출신 지휘자 라하브 샤니가 음악감독직을 이어받는다. 이미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취리히 톤할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스톡홀름, 서울,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두각을 드러낸 그는, 35세의 나이에 명문 악단을 이끄는 차세대 거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라하브 샤니. / 사진. ⓒ Marco Borggreve
라하브 샤니. / 사진. ⓒ Marco Borggreve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솔로 협연자로는 조지아(Georgia) 출신의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리사 바티아슈빌리가 무대에 올랐다. 오랫동안 베토벤 협주곡을 자신의 주요 레퍼토리로 삼아왔던 그녀는 최근 소니 레이블을 통해 음반으로도 발표한 바 있다. 섬세한 감성과 화려한 기교를 겸비한 바티아슈빌리는 안정된 호흡과 세련된 음색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이번 무대에서 그녀가 선택한 카덴차는 슈니트케의 버전으로 현대적 색채와 폭발적인 에너지가 돋보였다. 베토벤 협주곡이 끝난 뒤, 바티아슈빌리와 샤니는 크라이슬러의 왈츠곡 <아름다운 로즈마린(Schön Rosmarin)>을 바이올린과 피아노 이중주로 선사하며 답례했다. 무겁게 시작된 무대는 훈훈하고 우아하게 마무리하는 순간이었다.
라하브 샤니와 리사 바티아슈빌리가 앵콜곡을 연주하고 있다. / 사진. ⓒ 박마린
라하브 샤니와 리사 바티아슈빌리가 앵콜곡을 연주하고 있다. / 사진. ⓒ 박마린
이어진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에서는 뮌헨 필의 사운드 장기인 따뜻하고 소박한 목관 사운드가 두드러졌다. 안단테 콘 모토에서는 클라리넷 솔로가 오보에, 플루트, 다시 오보에로 이어지며 대화를 나누듯 흘러갔고, 이를 베토벤적인 힘찬 튜티가 받쳐주었다. 지휘봉 없이 맨손으로, 스코어 없이 암기로 지휘하던 샤니는 진정한 열정적 몰입으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Liebestod)’을 갈망과 죽음이 교차하는 드라마적 긴장으로 전개했다.

공연 당일 라하브 샤니가 무대에 입장하자 일부 객석에서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야유가 흘러나오는 해프닝이 벌어져 어이없는 긴장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예술가들이 정치적 상황의 타격을 피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라하브 샤니는 미동 없이 연주에 집중하며 음악으로 품위를 지켰으며, 샹젤리제의 객석은 뜨거운 박수와 함께 기립했다.
지난 9월 16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열린 뮌헨 필하모닉 공연. 지휘자 라하브 샤니와 바이올리니스트 리사 바티아슈빌리가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 ⓒ 박마린
지난 9월 16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열린 뮌헨 필하모닉 공연. 지휘자 라하브 샤니와 바이올리니스트 리사 바티아슈빌리가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 ⓒ 박마린
파리=박마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