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아메리칸 시네마' 시대 대표하는 배우
'내일을 향해 쏴라' 등 대표작
선댄스 영화제 창설로 독립영화 부흥 힘써
로버트 레드포드가 죽었다. 로버트 레드포드 같은 사람에게는 이 말 한마디 외에는 사실 더 이상 언급하기가 힘들다. 그가 죽었다. 한 시대가 죽었다. 그는 자기 시대를 끌고 하늘로 갔다. 로버트 레드포드란 이름은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어쩌니저쩌니해도, 그리하여 이런저런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어쨌든 할리우드의 ‘황금광 시대’를 대변하던 인물이었다. 이제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로 인해 미국이 종말을 향해 빠르게 치닫는 이때, 할리우드 역시 그 우매하고 무식한 시대의 공격 앞에 가장 큰 방벽을 잃은 셈이 됐다. 무엇보다 가장 잘생긴 배우의 시대는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배우가 영화 한 편을 좌지우지하던 시대는 끝이 났다. 이제 그런 시대는 다시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는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악당이더라도 철철 넘치는 매력 때문에 사람들은 악을 두려워하거나 혐오하지 않게 됐다. 조지 로이 힐의 <내일을 향해 쏴라>(1969)가 그랬다. 그는 은행털이 악당이지만 사람들은 그가 제발 총에 맞지 않기를 바랐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1967)와 함께 1960년대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대표했던 작품들이다. 레드포드는 정상과 범죄의 시대, 그 경계도 무너뜨렸다. 레드포드가 범법자 역할을 맡으면 사람들은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생각하게 했다. 이토록 잘생긴 사람이 법을 어긴 들 그게 무슨 대수냐는 식의 생각을 하게 했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2013년 작 <컴퍼니 유 킵(The Company You Keep)>은 그 자신이 겪었던 한 시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1960년대 미국의 극좌 테러리스트 단체였던 ‘웨더 언더그라운드’의 실질적 지도자 닉 슬론(실제로는 흑인이었으며 이름은 아이리스로 버락 오바마의 정신적 멘토였다)에 대한 얘기이다. 닉 슬론은 신분을 세탁한 후 현재 짐 그랜트란 이름의 변호사로 살고 있지만 과거 슬론과 그의 동지(?)들은 미시간의 한 은행을 털다가 경비를 살해한 후 모두 숨어 지내고 있는 인물들이다. 미국에는 테러 살인사건과 관련해서는 공소시효가 없다. 영화는 닉 슬론과 함께 일을 저질렀던 샤론 솔라즈(수잔 서랜든)가 아이들을 다 키운 후 30년 만에 자수하면서 벌어지게 되는 얘기다. 국내 개봉 당시 달랑 2,173명의 관객만이 이 영화를 봤지만, 평자(評者)로서 보자면, 아무리 유명한 배우라 해도 한 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무수한 심적 고통을 겪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수작이었다. 영화는 센티멘탈하지만 그만큼 감동을 준다.
영화 <트루스> 속 로버트 레드포드와 케이트 블란쳇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그는 선댄스 영화제에 참가하는 독립영화인들에게도 큰 덕을 베풀곤 했다. 선댄스는 경쟁⦁비경쟁 혼합 영화제인데 여기서 상을 받는 작가들은 대체로 무명들이 많다. 레드포드는 이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감독들의 차기작에 스스럼없이 주연으로 출연해 주곤 했다. 감독 데이비드 로워리가 그런 행운을 누렸다. 로워리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공식 은퇴작 <미스터 스마일>(2018)을 감독했다. <미스터 스마일>은 전설의 은행털이범이었던 노신사가 초로의 여인(씨씨 스페이식)을 만나면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다는 이야기이다. 레드포드는 이때부터 ‘사라짐’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싶다.
레드포드가 타계한 직후 떠올랐던 영화는 희대의 명작 중 하나인 시드니 폴락 감독의 1975년 작 <코드 네임 콘돌(Three Days of the Condor)>이다. 거기에서 페이 더너웨이와의 연기 앙상블이 여전히 눈에 삼삼하다. 미국문학사협회로 위장된 CIA 지부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한다. 협회의 요원 중 한 명이었던 주인공 죠 터너는 영문도 모른 채 CIA 내부 암살단에 쫓기다 못해 한 여자 캐시(페이 더너웨이)의 집에 무작정 숨어들게 된다. 캐시는 터너가 잘생기고 젠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찍어서 벽에 걸어 놓은 사진을 보고 ‘불쑥’ 얘기하는 그에게 ‘불쑥’ 빠져들게 되면서 남자의 인생에 얽히게 된다. 터너는 캐시에게 말한다. “당신은 외로운 사람이군요.” 사진은 을씨년스러운 가로수들을 찍은 풍경 작품이다.
영화 <코드 네임 콘돌>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사람의 마음을 ‘단칼에’ 훔치던 뛰어난 배우의 삶이 끝났다. 어떤 사람의 죽음은 평이하지만, 어떤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을 멈추기가 힘이 든다. 누가 이제 터틀넥 스웨터를 입을 것인가. 누가 이제 선댄스의 독립영화인들을 뒷바라지할 것인가. 마침, 선댄스영화제가 발원지였던 유타주 솔트레이크(더 정확하게는 파크 시티)에서 콜로라도주의 대학도시로 유명한 볼더로 옮기는 시기이다. 2027년부터 선댄스영화제는 콜로라도에서 열린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콜로라도 볼더 대학 출신이다.
2010년쯤 선댄스영화제가 열릴 때 로버트 레드포드가 무대에 오르자, 집행위원장이었던 존 쿠퍼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얌전히 뒤에서 그를 에스코트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미국인들로서는 낯선 풍경이었다. 로버트 레드포드 앞에서 함부로 영화 얘기를 하는 건, 안될 말이다. 레드포드는 옛날 사람들에게는 <스팅>의 배우였으며 요즘의 젊은 친구들에게는 <어벤져스>의 늙은 악당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그는 평생 영화를 했다. 한 번도 다른 길을 가지 않았다. 89년의 삶은 화려했지만 지독한 자기 성찰의 과정에서 스스로 얻은 것이었다. <대통령의 음모(All the President’s Men)>(1976)에서의 밥 우드워드 역할을 하면서 백악관 정치부 기자의 원형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