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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지금 떠날 우연한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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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

    산책의 사계
    큰아이와 시작한 산책이 해를 넘겨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원래 계절 별로 행성이나 별자리를 보기 위해 주로 저녁 식사 이후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걷기는 어느새 다양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한강과 지류가 만나는 곳에서는 우연히 철새를 만났고 나무와 땅 모양을 보면서 지명의 유래를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역사 탐방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중랑천의 물닭 / 사진. ©김현호
    중랑천의 물닭 / 사진. ©김현호
    이제는 걷기가 먼저였는지 걷기에 관한 책 읽기가 먼저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걷는 순간마다 책을 떠올린 것은 분명합니다. 일상에 지친 순간에는 위로의 선물로 받은 소로의 『월든』을 읽었고,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부터 케리 앤드류스의 『자기만의 산책』까지 두루 읽었습니다. 도시 산책자 발터 벤야민의 프랑스 파리부터 빌 브라이슨이 걸었던 미국 동부의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이르기까지 걷는 이야기라면 가리지 않았죠.

    18세기에 살았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책도 읽었습니다.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통해 “내가 걷다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 마음은 다리가 움직일 때만 움직인다”고 말했는데, 그 말에 깊게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걷기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게 해줍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이 주는 벅찬 감정, 아이들과 대화 속에서 새기게 되는 감동적인 문장이 바로 걷기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죠. 걷기는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움직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산책은 사계와, 그것을 넘어서는 경험으로 기록됐습니다.

    원앙과 목련

    한강의 상류를 거슬러 오르다 보면 다양한 지류를 만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녹지가 풍부하고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중랑천 하류를 자주 방문하게 됩니다. 산책으로 시작한 한겨울의 걷기는 어느새 ‘탐조 기행’이 됐습니다. 처음엔 큰아이와 함께 나섰다가 “동생들에게 꼭 철새를 보여주고 싶다”는 작은 바람에, 몇 주 후에는 온 가족이 함께 나선 적이 있습니다. 청둥오리와 왜가리 등 도심 하천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조류는 물론 물닭, 가마우지, 갈매기까지 다양한 새들을 관측할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천연기념물인 원앙까지 만날 수 있습니다.
    [위] 중랑천의 원앙 [아래] 윤슬을 닮은 새 떼 / 사진. ©김현호
    [위] 중랑천의 원앙 [아래] 윤슬을 닮은 새 떼 / 사진. ©김현호
    탐조 기행을 통해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아이들의 문장도 하나 같이 아름답습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4학년이 된 둘째 아이는 중랑천 하류의 퇴적물이 만들어낸 삼각주에 옹기종기 모여든 철새들을 보며 “아빠, 나는 저 새 떼가 꼭 윤슬 같아. 그래서 더 좋아”라고 말했습니다. 몇 개월이 흘러 새봄이 시작되고 목련이 막 피어나기 직전 모습을 봤는데, 겨울에 봤던 철새 떼와 윤슬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윤슬은 철새가 되고, 철새 떼는 다시 목련으로 이어지는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니, 막상 자연에 서식하는 원앙 떼를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원앙은 혼례품에 담는 목각 장식으로만 알고 있었으니까요. 겨울과 봄의 산책에는 새와 꽃이 가득했습니다.

    너구리는 라면 이름일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어서는 양재천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난 후에 달리기를 위해 들르곤 했던 양재천을, 가끔은 밝은 시간에 걷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내일의 숙제도 오늘의 독서도 모두 끝나 지루한데, 지금 하고 싶은 건 산책 정도밖에 없다”는 초등학교 6학년 큰아이의 뜻에 따라, 아직 어둠이 내려앉지 않은 천변을 거닐었던 것이죠.
    우연히 너구리를 마주치게 되는 서울 양재천 / 사진. ©김현호
    우연히 너구리를 마주치게 되는 서울 양재천 / 사진. ©김현호
    그리고 마침내 양재천의 터줏대감인 너구리 가족을 만나게 됐습니다. 너구리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平成狸合戦ぽんぽこ, 헤이세이 너구리 대작전, 1994)>이나 아이들의 그림책에서 둔갑술을 부리는 동물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물을 보고 나니 참 벅찼습니다. ‘너구리는 단지 라면 이름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분명히 존재하는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너구리는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되며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하거나 접촉해서는 안 될 야생동물입니다. 다만 산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자연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십만 개의 화살을 만나는 가을

    가을 산책에선 『삼국지연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습니다. 동네 어귀마다 조경을 위해 심어둔 화살나무는 잎이 지고 난 계절에 그 모습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영락없이 화살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화살나무의 줄기는 마치 수없이 많은 화살을 가지런히 꽂아둔 듯 보입니다. 화살나무를 보며 적벽대전에 앞서 제갈공명의 지략으로 얻어 낸 십만 개의 화살을 떠올렸습니다. 때마침 삼국지를 읽기 시작한 저희 아이들도 화살나무를 보며 『삼국지연의』 속 이야기를 상상했습니다.
    도시의 화살나무 / 사진. ©김현호
    도시의 화살나무 / 사진. ©김현호
    화살나무로 시작된 삼국지는 아이들에게 ‘다음 편을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 계속 읽게 되는 독서’가 무엇인지 알게 했습니다. 동탁과 갈등을 빚은 여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제갈공명이 화살 십만 개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계속 궁금해했습니다. 다음 책을 읽어야만 알 수 있기에 내용을 미리 알려주지는 않았더니, 결국 도서관에서 관련된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산책을 하지 않았다면 만났을 리 없는 화살나무가 왠지 모르게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화살나무로 시작해 『삼국지연의』로 이어진 산책은 동묘*에 이르자 마무리됐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다시 산책할 수 있게 된 계절에 아이들과 함께 지하철 6호선 동묘앞역 인근의 동묘공원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동묘는 주말마다 동네 전체가 거대한 장터로 변하는 곳입니다. 가을 산책을 통해 장소성이 짙은 공간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버린 건축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주말이면 거대한 장터로 변하는 동묘 인근 / 사진. ©김현호
    주말이면 거대한 장터로 변하는 동묘 인근 / 사진. ©김현호
    우연의 산책

    사계절 산책의 여러 즐거움 가운데 우리를 가장 크게 감동시키는 것은 ‘우연성’입니다. 산책 중 뜻밖에 마주친 너구리와 원앙, 화살나무를 보며 떠올린 제갈공명과 적벽대전처럼 말이죠. 사카모토 류이치의 곡 가운데 우연히 마주친 음악도 다름 아닌 ‘사계(四季, shiki)’였습니다. 오누키 타에코가 부르고 사카모토 류이치가 피아노를 연주한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가사를 읽어보기 전에도) 어쩐지 계절에 따라 변하는 산책길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 & 오누키 타에코 - 사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루는 멀어지고 조금씩 잊혀져 가고 계절은 다시 돌아오고 매일 이별하며 살아갈 터이니, 오늘 저녁에는 가볍게 산책에 나서 우연의 모험을 떠나보면 어떨까요?

    김현호 칼럼니스트


    *이제는 동묘(동관왕묘, 東關王廟)가 촉나라 장수였던 운장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라는 점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죠. 우리나라에 왜 관우를 기리는 장소가 있는지도 어느덧 잘 알려졌고요. 서울의 동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했던 명나라의 요청으로 건립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삼국지연의』의 인물 운장 관우를 기리는 동묘 / 사진. ©김현호
    『삼국지연의』의 인물 운장 관우를 기리는 동묘 / 사진. ©김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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