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와 시작한 산책이 해를 넘겨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원래 계절 별로 행성이나 별자리를 보기 위해 주로 저녁 식사 이후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걷기는 어느새 다양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한강과 지류가 만나는 곳에서는 우연히 철새를 만났고 나무와 땅 모양을 보면서 지명의 유래를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역사 탐방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18세기에 살았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책도 읽었습니다.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통해 “내가 걷다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 마음은 다리가 움직일 때만 움직인다”고 말했는데, 그 말에 깊게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걷기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게 해줍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이 주는 벅찬 감정, 아이들과 대화 속에서 새기게 되는 감동적인 문장이 바로 걷기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죠. 걷기는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움직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산책은 사계와, 그것을 넘어서는 경험으로 기록됐습니다.
원앙과 목련
한강의 상류를 거슬러 오르다 보면 다양한 지류를 만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녹지가 풍부하고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중랑천 하류를 자주 방문하게 됩니다. 산책으로 시작한 한겨울의 걷기는 어느새 ‘탐조 기행’이 됐습니다. 처음엔 큰아이와 함께 나섰다가 “동생들에게 꼭 철새를 보여주고 싶다”는 작은 바람에, 몇 주 후에는 온 가족이 함께 나선 적이 있습니다. 청둥오리와 왜가리 등 도심 하천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조류는 물론 물닭, 가마우지, 갈매기까지 다양한 새들을 관측할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천연기념물인 원앙까지 만날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어서는 양재천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난 후에 달리기를 위해 들르곤 했던 양재천을, 가끔은 밝은 시간에 걷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내일의 숙제도 오늘의 독서도 모두 끝나 지루한데, 지금 하고 싶은 건 산책 정도밖에 없다”는 초등학교 6학년 큰아이의 뜻에 따라, 아직 어둠이 내려앉지 않은 천변을 거닐었던 것이죠.
가을 산책에선 『삼국지연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습니다. 동네 어귀마다 조경을 위해 심어둔 화살나무는 잎이 지고 난 계절에 그 모습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영락없이 화살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화살나무의 줄기는 마치 수없이 많은 화살을 가지런히 꽂아둔 듯 보입니다. 화살나무를 보며 적벽대전에 앞서 제갈공명의 지략으로 얻어 낸 십만 개의 화살을 떠올렸습니다. 때마침 삼국지를 읽기 시작한 저희 아이들도 화살나무를 보며 『삼국지연의』 속 이야기를 상상했습니다.
화살나무로 시작해 『삼국지연의』로 이어진 산책은 동묘*에 이르자 마무리됐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다시 산책할 수 있게 된 계절에 아이들과 함께 지하철 6호선 동묘앞역 인근의 동묘공원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동묘는 주말마다 동네 전체가 거대한 장터로 변하는 곳입니다. 가을 산책을 통해 장소성이 짙은 공간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버린 건축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사계절 산책의 여러 즐거움 가운데 우리를 가장 크게 감동시키는 것은 ‘우연성’입니다. 산책 중 뜻밖에 마주친 너구리와 원앙, 화살나무를 보며 떠올린 제갈공명과 적벽대전처럼 말이죠. 사카모토 류이치의 곡 가운데 우연히 마주친 음악도 다름 아닌 ‘사계(四季, shiki)’였습니다. 오누키 타에코가 부르고 사카모토 류이치가 피아노를 연주한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가사를 읽어보기 전에도) 어쩐지 계절에 따라 변하는 산책길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 & 오누키 타에코 - 사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루는 멀어지고 조금씩 잊혀져 가고 계절은 다시 돌아오고 매일 이별하며 살아갈 터이니, 오늘 저녁에는 가볍게 산책에 나서 우연의 모험을 떠나보면 어떨까요?
김현호 칼럼니스트
*이제는 동묘(동관왕묘, 東關王廟)가 촉나라 장수였던 운장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라는 점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죠. 우리나라에 왜 관우를 기리는 장소가 있는지도 어느덧 잘 알려졌고요. 서울의 동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했던 명나라의 요청으로 건립된 것으로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