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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 속의 질서, 숲으로 간 정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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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서 3년 만에 신작 공개
    <멀리서 너무 가깝게>로 인간, 동물, 자연 응시

    초현실주의 사진 거장 랄프 깁슨이 선정한
    제 1회 랄프 깁슨 어워드 수상자 중 한 명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하는 모든 존재에 대한 경의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에서 정희승 작가의 개인전 <멀리서 너무 가깝게>가 8월 말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연에서 발견한 우연성을 탐구하며, 이미지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수행적 태도로 고찰하고 있다.

    지난 6월 말, 부산의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에는 많은 관람객으로 붐볐다. 초현실주의 사진의 거장 랄프 깁슨이 직접 선정한 제1회 ‘랄프 깁슨 어워드’ 수상자 중 한 명인 정희승 작가가 3년 만에 선보인 신작을 보기 위해서였다. 정희승 작가의 예술 세계를 지지하는 관람객들과 오랫동안 그의 작업을 이해하고 응원해 온 동료 큐레이터, 작가들이 모여서 전시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전시의 제목은 빔 벤더스의 영화 <Faraway, So Close!>에서 차용했다. 영화 속 천사 ‘카시엘’처럼, 작가 역시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며 사물과 인간, 동물과 자연을 동일한 밀도로 응시한다. 그동안 대상을 이미지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가능성과 한계를 탐구해온 작가는, 이번 신작에서는 보다 겸허한 태도를 취하며 작업에 임했다. 이름 모를 새의 죽음을 시작으로 시각적 내러티브를 이어가는 ‘멀리서 너무 가깝게’ 연작과, ‘길을 잃는 감각’을 일깨우는 ‘윌더’ 연작 등 신작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하는 세상 모든 존재들에 대한 경의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희승 작가. / 사진. ⓒ 진소연
    정희승 작가. / 사진. ⓒ 진소연

    ▷3년 만에 신작을 발표하게 된 이유가 번아웃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네, 그 순간이 딱 기억나요. 2021년 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시작된 <올해의 작가상 2020> 전시를 마무리할 때였어요. 그날도 작업실에 앉아 있는데, 머릿속에서 실처럼 가느다랗고 긴 무언가가 휙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기운이 쭉 빠졌어요. 그리고 ‘이제 내가 뭘 해야 하지’하는 생각이 밀려들었죠. 번아웃이 그렇게 갑자기, 한순간에 찾아올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고, 또 놀라웠어요. 그 이후로, 사실 꽤 오랜 시간 그 상태를 극복하는 데 힘들었어요. 거의 3년 가까이 번아웃과 함께, 우울증에 가까운 상태로 머물렀던 것 같고요. 그러다 어느 날, 제주도 숲 속에 가서 다시 작업을 시작할 힘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어요."

    ▷숲에 가서 다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과정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어요.

    "아직 한창 겨울인 2월이었어요. 우연히 사려니 숲에 들어갔고, 한라산 바로 아래를 따라 비자림로를 걷기 시작해 몇몇 오름을 지나,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삼나무 숲길을 걸었어요. ‘신성하다’는 의미를 가진 그 숲은 침엽수가 무성하고, 겨울이 되면 더욱 황량하게 느껴졌어요.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어디보다 인적도 드물었고요. 나는 그 숲을 혼자서 비를 맞으며 오랜 시간 동안 걷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생각은 멈춘 몸보다, 움직이고 감각하는 몸에서 비롯된다고 하잖아요. 니체를 포함한 많은 철학들이 평생 걷기를 사유의 방식으로 삼았던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고요.

    숲에서는 애초에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아요. 숲이 산과 다른 점은, 산은 정상으로 향하는 정복자들의 공간이라면, 숲은 방황하는 이들을 위한 곳이에요. 만약 숲에 들어가는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길을 잃기 위함이고, 그 길을 잃는 행위 자체가 숲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인 것 같았어요. 위계 없는 세계인 숲 속에서, 죽은 것들과 살아있는 것들, 정지된 것들과 움직이는 것들과 함께 걷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너무 평온해졌어요. 예전의 나와 연결이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이 힘들었는데, 숲길을 걷는 동안 다시 나 자신과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이었고, 그래서 ‘여기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희미한 결심이 서기 시작했죠. 어쩌면 그냥 그 숲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작업 자체가 결국은 그 숲에 가기 위한 핑계였을 수도 있고요."
    무제(Untitled), 100x75cm, Archival Pigment Print. /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무제(Untitled), 100x75cm, Archival Pigment Print. /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는 미술관의 세 층에 걸쳐 다양한 형식으로 펼쳐진다. 특히, 조명을 어둡게 조성한 지하 전시장에는 백현진 작가가 제작한 사운드와 함께 ‘윌더(Wilder)’ 연작의 네 점이 선보인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게 되고, 불연속적인 리듬의 사운드 속에서 겨울 숲을 촬영한 2미터가 넘는 작품들이 하나둘 전시 공간을 채운다. 가운데에는 틈이 있고, 철제 프레임에 고정된 숲의 사진들이 교차하며 전개된다. 작품 사이를 걸어가며, 숲은 마치 회화처럼 다가오면서 동시에 현실감과 비현실감이 교차하는 기묘한 경험이 펼쳐진다.
    정희승 작가 개인전 <멀리서 너무 가깝게> 지하 전시장 전경. /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정희승 작가 개인전 <멀리서 너무 가깝게> 지하 전시장 전경. /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지하 전시장에서 ‘윌더’를 감상하며 작가님이 말씀하신 ‘길을 잃는 감각’을 체험할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사진이 너무나 생생한데 회화적이라 느낌이 묘했습니다.

    "네, 좀 이상하죠. 숲의 뒷부분은 오히려 포커스가 잡혀서 선명하고, 앞쪽은 그렇지 않거든요. 보는 것과는 다르게 뒤틀려 있는 공간들이에요. 이렇게 만들어야 숲의 무수한 세부와 깊이, 그리고 얽혀 있는 공간들, 그 구조를 좀 더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 작업을 위해 가까운 동료인 백현진 작가에게 숲의 해상도와 관련된 사운드를 부탁했어요. ‘윌더’의 제작 방식을 설명하자면 하나의 이미지를 두 개의 패널로 나누어서, 알루미늄 복합 패널에 각각 마운트하고, 세심히 설계한 철제 프레임 구조에 고정했어요. 두 패널은 1cm의 간격을 두고 세워졌지만, 하나의 구조물로서 작품을 완성하죠. 이미지를 분할하면서도 하나의 완성된 작업으로 연결하는 이 형식은, 몰입과 단절, 이 두 감각이 공존하는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할 거에요. 기본적으로, 이 금속성 프레임 구조와 숲의 이미지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면서 긴장감을 만들어내죠. 이 구성이 나온 배경은, 사실 그 크기의 사진 작품을 한 번에 마운트하는 게 기술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저는 이 ‘1cm의 틈’이 오히려 우리 눈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행위의 무수한 가능성과 연결된다는 점을 은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하의 ‘윌더’ 연작은 2층에서 소개된 ‘풀밭 위의 구두’ 연작과 긴밀히 연결되며, 이는 또 ‘멀리서 너무 가깝게’ 연작과 만나 내러티브적으로 확장되는데요, 전체적으로 이번 신작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촬영 환경과 대상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 큰 변화처럼 느껴졌어요. 그간 초상 연작, 정물 사진, 역사적 공간 등을 사진으로 담아냈지만, 이렇게 자연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 적은 없었던 것 같거든요. 실내 공간에서 실외 공간으로의 변화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네, 맞아요. 저는 주로 스튜디오를 기반으로 하는 작업을 해왔고, 자연이라는 대상을 작품 주제로 삼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어요. 풍경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고요. 그래서 기존 작업들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죠. 사실 ‘멀리서 너무 가깝게’ 연작의 사진들은 예전의 저였다면, ‘고해상의 스냅 사진’이라며 전시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의도로 찍은 것도 아니었고요. 제주 여행을 기록하는 개인적 풍경 사진에 더 가까웠죠. 그런데 사려니 숲을 경험하면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고, 저 자신도 많이 변했어요.

    지금까지는 쉽게 기호화되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어요. 사진이 재현하는 대상은 이미 언어의 틀 안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상징화된 관습적 틀 속에서 읽어내는 방식에 너무 익숙하잖아요. ‘이 사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는 질문이 바로 그 관습을 반영하죠. 그 질문은 사진을 기호로 환원시키고 결국 이미지는 소멸시켜 버리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 편집과 배치 방식을 통해 의도적으로 ‘읽히는 것’을 방해하는 실험들을 해왔어요. 이번 전시의 작업들을 하면서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는 않았고요. 다만 이번에 느낀 건 우리가 세상을 보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많은 틈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위에 놓여 있는가 하는 점이에요.

    숲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쉽지 않더라고요. 거의 1년 가까이 이베이에서 고가의 렌즈와 장비들을 하나하나 구입하며 준비했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을 때도 많았어요. 해와 구름은 계속 위치를 바꾸고, 노출은 부족하고 셔터스피드는 조금 느리고…. 그 과정에서 저는 불확정성과 통제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그 덕분에 큰 자유를 느끼게 됐어요. 그리고 그런 과정 자체가 제 삶에 대한 태도와 생각에 깊은 영향을 미쳤어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내면의 변화 자체가 굉장히 의미 있는 경험이었어요."
    무제(Untitled), 100x75cm, Archival Pigment Print. /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무제(Untitled), 100x75cm, Archival Pigment Print. /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무제(Untitled), 165x220cm (a set of 2 panels), Archival Pigment Print. /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무제(Untitled), 165x220cm (a set of 2 panels), Archival Pigment Print. /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협재 해변에서 원 테이크로 촬영한 영상 작품 ‘해변에서(On the Shore)’를 8분 20초동안 감상하는 경험은, ‘정물’을 뜻하는 ‘Still Life’를 살아있는 한 장면처럼 느끼게 하는 멋진 체험이었어요. 이 작품은 처음 시도한 형식으로 알고 있는데, 오는 9월 갤러리 바톤 개인전에서도 계속 선보이시나요?

    "‘해변에서’와 같은 형식으로 여러 작품을 만들었어요. 다음 갤러리 바톤 개인전에서는 아마 사운드가 더해진 버전으로 새롭게 선보일 것 같고요. 제주에 머무는 동안에는 늘 제 노트북에 기상청 웹사이트를 띄워 놓고 있으면서, 촬영 후 돌아오는 길에는 꼭 협재 해변에 들러 노을을 기다리곤 했어요. 겨울 해변에서, 서로 다른 리듬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파도, 구름, 새들이 같은 시간 속에 머무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또 어떤 날은 숙소 정원에서 촬영하던 중에,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갑자기 하늘이 흐리다가 눈이 내리거나, 어디선가 고양이가 지나가기도 했죠. 그 모든 순간들은, 어떤 질서와도 관계없는 완전히 우연한 세계에 속한다는 느낌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사진과 영상의 경계에서, 그 세계를 조용히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무제(Untitled), 90x120cm, Archival Pigment Print. /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무제(Untitled), 90x120cm, Archival Pigment Print. /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무제(Untitled), 132x99cm, Archival Pigment Print. /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무제(Untitled), 132x99cm, Archival Pigment Print. /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와 함께 발간한 동명의 사진집 『2025 랄프 깁슨 어워드-멀리서 너무 가깝게』에서 작가님의 글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편집 디자인을 박연주 디자이너가 맡았더군요. 2014년부터 함께 미술 독립 출판사 헤적프레스를 이끌어 오셨죠? 출판사를 운영하는 것과 사진 작업 시 꼭 직접 프린트를 하시려는 고집이 어떤 연결점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마도 제가 그림을 그렸던 경험이 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그래서 종이나 재료를 직접 다루는 것을 좋아하게 됐죠. 사진 작업의 많은 과정이 컴퓨터에서 이루어지지만, 프린트야말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정확한 컬러라는 것이 사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어디서 보느냐, 어떤 조명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색 온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좋은 프린트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아요. 아무리 프레이밍이 완벽하고 기술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사진이라도 프린트가 정확하지 않으면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기 어려워요. 그리고 인쇄는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모니터가 아무리 잘 캘리브레이션되어 있다 해도, 그 결과물은 여전히 예측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요. 사진의 컬러와 톤, 인쇄 시 종이의 물성 등은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영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런 요소들은 우리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뉘앙스를 만들어내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다음 전시를 위한 주제나 심상에 대해 조금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다음 전시를 위해 준비하는 주제로는,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 나오는 ‘사진은 겁을 주고 격분하며 상처를 줄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복적이다’라는 구절을 떠올리고 있어요. 깊이 생각에 잠긴 사진들을 보여드릴 생각입니다."

    안동선 프리랜서 미술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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