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참여했던 오디세우스가 귀향하기까지는 20년이 걸렸다. 아내와 아들이 있는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은 글자 그대로 모험이었고 모두가 두려워하던 키르케와 칼립소 등과의 인연은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오디세우스가 귀향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곁에 묶어 두려 온갖 술수를 부리지 않았는가. 그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이는 파이아키아의 공주 나우시카이다. 나우시카는 여신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선량하고 사려 깊은 일개 공주일 뿐이다.
어느날 나우시카의 꿈에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시녀들과 해변에서 빨래하라고 명하고, 나우시카는 그 말대로 다음 날 해변으로 향한다. 그곳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오디세우스. 이미 갖가지 험난한 모험을 겪을 대로 겪은 터라 몰골이 말이 아닌 그를 보고 시녀들은 비명을 지르고 도망쳐 버린다. 하지만 용기와 품위를 갖춘 나우시카는 그의 말을 경청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 도움을 받게 한다. 굳건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 2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끊임없이 이어져 온 인간의 이기적인 행동은 결국 자연을 파괴하는데 이르고 지구는 거대 곤충 오무와 독을 내뿜는 식물로 가득한 부해로 뒤덮여 버린다. 이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스크가 필수이며 인간에게 적대적인 부해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더구나 지구의 생태계를 파멸시키는 데 사용된 거신병을 이용해서 부해를 없애려는 어이없는 일을 벌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바람계곡의 공주 나우시카는 부해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데 바로 인간이 파멸로 이끈 지구를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것이 부해라는 것이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신음하고 있는 지구 위에서 인간들은 아직도 전쟁을 그치지 않고 대립하고 있으며 (투르메키아 왕국의 사령관 쿠샤나는 바람계곡을 침공하고 페지테 역시 투르메키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무엇보다 부해를 위협으로 느껴 제거하려 하면서 파멸의 도구로 쓰인 거신병을 다시 이용하려 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인다.
이제 투르메키아와 페지테, 바람계곡은 전투 태세에 돌입하는데 유충을 빼앗긴 오무의 무리가 바람계곡으로 돌진하고 나우시카는 간신이 유충을 구해낸다. 하지만 이미 성이 난 오무의 무리는 그대로 계곡으로 몰려들고 나우시카는 그들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 죽음의 문턱에 이른다. 오무의 무리가 점차 노여움을 가라앉히게 되면서 자신들의 촉수로 나우시카를 치유하고 바람계곡의 사람들은 ‘대지를 정화 시키려 푸른 옷을 입고 나타날 구세주’에 대한 예언을 떠올린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
이제는 국내에서도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 나아가서 다카하타 이사오의 이름은 꽤 친숙하게 여겨진다. 개인적으로는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루팡 3세:칼리오스트로의 성>, <이웃집 토토로>, <붉은 돼지> 등을 접하게 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 매료되었고 오래전 TV에서 방영된 <미래소년 코난>이 그가 총연출한 작품임을 알게 되면서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됐다. 그의 작품 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았을 때 받았던 일종의 충격은 지금까지 선연하다.
처음 볼 때는 단순히 ‘자연’에 대한 철학을 이렇게 풀 수 있구나, 정도였달까. 그리고 누가 보아도 신화적인 장치인 ‘푸른 옷의 선인’이 나우시카와 연결되는 부분에서는 마음이 웅장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발견한 이나바 신이치로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나우시카를 읽는다>라는 책을 구입해 읽으면서 애니메이션 한 편에 담긴 자연에 대한 생각과 숙고 그리고 재미있는 서사를 갖춘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1982년부터 1994년까지 연재된 만화 원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놀라웠고 애니메이션이 1984년에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만화 원작과는 다른 디테일과 구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었다.
사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상당히 자연친화적인 요소들이 많음을, 전문가가 아니어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기본적인 논제를 끌어내는 방식이 너무나 세련되고 치밀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앞서 소개한 책에 수록된 인터뷰를 읽어보면 이 작품 속에 녹여낸 그의 철학이 새삼 진하게 다가오는데 한 군데 인용해 보기로 하자.2)
“... ‘푸른 청정의 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든지 최후의 심판이 정해져 있어서 이렇게 살 필요가 없다든지 결말을 모르니 살 수 있다든지...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이해의 차원이 아닙니다. (중략) 살아간다는 것은 사물을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공존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겠죠. 나우시카가 지닌 가장 근본적인 능력은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순간을 느낄 수 있는 힘인 것 같습니다... ”
특히 일본의 애니메이션 작품 속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생각이 ‘살아남아라’ 혹은 ‘살아가라’의 뉘앙스인데 결국 나우시카를 통해서 전달받는 것도 삶인 것이다. 또한 그 삶은 인간이 밟고 서 있는 대지, 자연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지브리의 작품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풍과 다카하카 이사오의 풍으로 나뉜다. 두 사람의 그림체나 연출방식이 달라서 언뜻 보면 미야자키의 것은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허구의 세계라는 느낌이 들고 다카하타의 것은 일상, 자연을 그대로 우려낸 실제의 세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자연’이며 ‘환경’이다. 그것을 파악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4)
다카하타 이사오의 대표작인 <추억은 방울방울> 대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느끼는 자연은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농작하기 위해 인간과 자연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풍경이다. 그래서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고 그것을 자연 그 자체라고 여기면 곤란하다”고 말한다.5)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연관은 그와는 달라서 자연의 시각으로 볼 때 인간은 ‘처음부터 더러움을 짊어지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6) 그는 인간 중심의 자연관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 자연의 영혼> 스틸컷 / 사진제공.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어쩌면 이런 생각들이 그의 작품에서 만물을 향한 경외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모노노케 히메>나 <벼랑 위의 포뇨>,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 그런 느낌이 강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그의 작품들이 상상의 것, 이상적인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그 작품들의 다른 층위를 들춰본다면 결국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늘 자연을 이야기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철학과 생각이 집대성된 다큐멘터리가 <미야자키 하야오 : 자연의 영혼>일 것이다. 그의 일련의 작품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나타난 자연에 대한 생각과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 각 시대상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변주되었는지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들이 작품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 자연의 영혼>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아마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신 분들은 이 작품이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철학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미야자키 하야오 : 자연의 영혼>은 그 질문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관객들에게 던진다.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자신과 우리가 포함관 인류에게 이렇게 물어 오고 있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신지혜 칼럼니스트·작가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메인 예고편]
1)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4년에 제작된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2025년 6월 국내 개봉. 2) 『미야자키 하야오의 나우시카를 읽는다』. 이나마 신이치로 지음. 정윤아 옮김. 미컴. 1999년. 3) 애니메이션. 2025년 국내 개봉. 4) 『미야자키 하야오 論』. 키리도시 리사쿠 지음. 남도현 옮김. 송락현 감수. 써드아이. 2002년. 5) 『미야자키 하야오 論』. 키리도시 리사쿠 지음. 남도현 옮김. 송락현 감수. 써드아이. 2002년. p.358 6) 『미야자키 하야오 論』. 키리도시 리사쿠 지음. 남도현 옮김. 송락현 감수. 써드아이. 2002년. p.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