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제작비 9억→30억→70억…'K콘텐츠 공룡'도 두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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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사 절반이 적자…K웨이브 '경고등'
◇돈 못 버는 제작사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지난 3월 발표한 ‘2025 해외한류실태조사’를 보면 조사 대상 28개국 2만6400명 중 63.8%는 한류가 제품 및 서비스 구매에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다. 지난해 국내 화장품 수출 규모가 102억달러로 전년 대비 20.6% 증가해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린 것도 한류 영향으로 분석된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K콘텐츠 수출이 1억달러 늘면 소비재 수출은 1억8000만달러 증가하는 효과가 있다.하지만 K콘텐츠를 생산하는 국내 제작사 대부분은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이 국내 증시에 상장된 영화·드라마 제작사 11곳(삼화네트웍스, 쇼박스, 스튜디오드래곤, 스튜디오산타클로스, 아티스트스튜디오, 에이스토리, 초록뱀미디어, 콘텐트리중앙, 키이스트, 팬엔터테인먼트, NEW)의 재무제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5곳만이 흑자를 기록했다. 대기업인 CJ그룹 계열사 스튜디오드래곤이 364억원, 천만 영화 ‘파묘’를 제작한 쇼박스가 245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을 뿐 나머지 제작사의 흑자 규모는 10억원에도 못 미쳤다.
대형 제작사 중에도 적자를 면치 못한 곳이 많다. NEW와 초록뱀미디어는 각각 190억원, 154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콘텐트리중앙은 474억원의 적자를 냈다. 일부 제작사는 영업손실률이 100%에 달했다.
◇배우들 출연료 폭등
제작사들이 적자에 허덕이는 주요인은 제작비 급증이다. 넷플릭스가 국내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한 2016년. 그해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도깨비’의 회당 제작비는 9억원이었다. 평균 3억원이던 국내 드라마의 회당 제작비를 가뿐히 뛰어넘은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3년 뒤 넷플릭스가 내놓은 첫 오리지널(독점 공급) 한국 드라마 ‘킹덤’은 회당 제작비로 30억원이 들었다. 도깨비에 비해 세 배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됐다. 작년 말부터 방영 중인 ‘오징어 게임’ 시즌 2와 오는 6월 공개 예정인 시즌 3는 70억원이 넘을 것이란 게 업계 추정이다.넷플릭스는 국내 진출 후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영상 콘텐츠 생태계를 완전히 바꿔놨다. 넷플릭스는 오리지널 영화와 드라마 제작비를 100% 대준다. 여기에 제작비 대비 일정 비율을 마진으로 제공한다. 넷플릭스는 이 마진율을 공개하고 있지 않지만, 업계에서는 2~3년 전까지 20% 정도를 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총제작비가 500억원인 작품을 넷플릭스에 독점 공급하면 제작사는 100억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넷플릭스는 한국 드라마 제작비가 미국에 비해 저렴하기 때문에 제작비 상승을 어느 정도 용인했다. 2022년 넷플릭스에 독점 공급한 한국 드라마 ‘수리남’은 회당 제작비 58억원, 총제작비 350억원으로 추정된다. 같은 해 방영을 시작한 미국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시즌 4’는 회당 제작비가 395억원, 총제작비는 3555억원이었다.
이 같은 시스템은 배우들의 출연료 폭등을 불러왔다. 최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한국 넷플릭스 드라마에 출연한 남녀 주연배우는 출연료로 80억원씩을 받아 간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비 중 30%를 두 명이 가져간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배우들의 눈높이가 넷플릭스에 맞춰져 있어 넷플릭스 방영작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출연료를 줘야 한다”며 “모든 작품이 넷플릭스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닌데도 제작비는 동일하게 뛰는 셈”이라고 말했다.
주 52시간제로 제작 기간이 늘어난 것도 비용 상승으로 이어졌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16부작 드라마 기준으로 100~110일이던 촬영 일수가 제도 시행 후 160~180일로 증가했다”고 했다.
◇“넷플릭스 의존도 줄여야”
제작비에서 출연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드라마는 40~60%, 영화는 20~30% 정도다. 제작비와 출연료 감당이 어려워진 제작사들은 제작 편수 축소로 대응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방송국에서 방영된 국내 드라마는 2022년 141편에서 지난해 105편으로 25% 감소했다.영화는 OTT 등장 이후 극장을 찾는 관객이 줄어든 데다 배우들의 출연료 인상까지 더해져 이중고를 겪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772편이던 한국 영화 개봉작은 지난해 617편으로 감소했다. 지난해 국내 전체 영화관 매출은 1조1945억원으로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19년 1조9139억원 대비 37% 줄었다.
국내 제작사의 넷플릭스 의존도가 높아졌지만, 넷플릭스는 최근 들어 제작사에 보장해주던 마진율을 깎기 시작해 이 비율이 5~7% 수준까지 내려왔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작품의 제작비가 급증하자 넷플릭스가 마진율을 조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넷플릭스는 인도 시장에 17억달러(약 2조4000억원)를 투자하고, 태국 필리핀 투자액도 늘리는 등 한국보다 제작비가 저렴한 아시아 국가로 눈을 돌리고 있다. 국내 제작사들 사이에서 K콘텐츠 인기가 시들해지면 넷플릭스가 언제든 한국 투자를 줄일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한 이유다. ‘2025 해외한류실태조사’를 보면 28개국 한류 소비자의 작년 기준 한국 드라마 월평균 시청 시간은 17.5시간으로 2022년 대비 4시간가량 줄었다.
제작사들은 적은 비용으로 제작한 독립·예술 영화와 단편 드라마를 방영할 채널이 많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여러 개의 ‘중박 작품’으로도 생존이 가능해지고, 콘텐츠 다양성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다. 넷플릭스와 ‘머니 게임’이 불가능한 국내 OTT와 방송사가 이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배대식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사무총장은 “제작비 진입장벽을 낮춰야 좋은 영상을 만들 수 있는 작가와 연출자가 배출된다”며 “그래야 콘텐츠 경쟁력도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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