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무연고자'가 된 열린우리당 당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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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가족의 외아들이었던 고인은 1982년 고려대 체육교육학과에 들어간 뒤 양궁 선수로 활약했다.
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의 페이스북 글을 보면 "양궁 선수 출신다운 큼직한 풍채와 너른 품을 가진 친구"였다.
고려대 '운동권' 학생이었고, 대학생 때부터 이철 전 의원을 도우며 민주당과 관계를 맺었다고 열린우리당 시절의 지인 최만선씨는 기억했다.
고인은 민주당, 열린우리당에서 '온갖 궂은일은 다 하면서도 자리를 요구하지는 않은' 이로 기억됐다.
천 이사도 페북에 "나도 비주류의 길을 걸어온 편이지만, 그는 항상 비주류의 비주류였다.
그러나 동료들의 선택에 항상 너그러웠다"고 적었다.
2004∼2007년 열린우리당 서울시당 사무처장을 거쳐 서울정책재단 사무처장과 북방경제연구회 준비위원장(2018년)을 맡았다.
선거 때만 되면 나타나서 각종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자원봉사자였기에 민주당에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유명 인사였다.
정운찬 전 총리의 대선 도전을 지원했고, 그 인연으로 정 전 총리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였을 때 관련 행사에 얼굴을 비쳤을 정도니 인맥은 '범(汎)' 민주당 급이었다.
아버지에 이어 2010년 어머니까지 작고한 뒤 혼자서 생활했다.
고인이 급격히 고립된 것은 지난해 5월 지병으로 입원, 투병 생활을 하면서부터. 관악구의 '숙소'에서 산 데다 휴대전화까지 바꾸면서 연락처를 모두 잃어버렸다.
서울 관악구청에 따르면 그래도 지인 중 누군가가 고인의 숙소에 드나들었고, 지난 1일 숨진 고인을 발견해 신고한 것도 이 지인이었다.
장사법은 배우자, 자녀, 부모, 조부모, 손주, 형제자매라는 좁은 범위의 가족관계에 해당하는 이가 있고, 장례를 치를 목돈이 있는 사람만 합법적인 연고자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혼 배우자나 친인척도 자기 돈을 내면 '시신이나 유골을 사실상 관리하는 자'라는 자격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다지만 고인에겐 그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친구나 지인은 장례를 치를 수 없을까.
2023년에 바뀐 장사법에 따라 '장례주관자'로 인정받으면 무연고 공영장례를 치를 수 있지만 아직 모르는 이들이 많다.
서울시 공영장례를 지원하는 '나눔과 나눔'의 박진옥 이사는 13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1일 고인을 발견한 지인이 빨리 '장례주관자' 자격으로 공영장례를 치르겠다고 했다면 좀 더 빨리 장례 절차가 진행됐을 것"이라며 서울시 공영장례지원 상담센터(☎ 1668-3412)로 문의해달라고 부탁했다.
관악구청 관계자는 "고인의 경우에도 '장례주관자' 관련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안됐다"고 설명했다.
바꿔 말하면 '직계가족'이 없는 한 고인이 당직자 출신이건, 인맥이 범 민주당 급으로 넓든 간에 '고독사' 후 '무연고 장례'를 치러야 하기 십상이라는 게 엄연한 현실인 셈이다.
박 이사는 "앞으로 고인과 같은 사례가 점점 늘어날 것"이라며 "제도를 바꿔서 '사회적 장례 지원'을 고민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12일 고인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충격을 받고 부랴부랴 '민주동지장'을 치르기로 했다는 열린우리당,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들이 진짜로 고민해야할 것은 어쩌면 이 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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