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한 글이 법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제재를 받는 일이 필화(筆禍)다. 사전에서나 보던 일이 내게 터졌다. 어둑한 골목길을 걸어 집 앞에 이르자 나를 본 낯선 두 남자가 다가섰다. 내 이름을 불러 본인임을 확인한 그들이 커피 한잔하자고 했다. 다방으로 갈 때 한 사람은 내 뒤를 바짝 쫓았다. 먼저 자리에 앉은 이가 태릉경찰서 보안과장이라고 자기 신원을 밝히며 내 신원을 다시 확인했다. 내 옆자리 앉은 이가 내가 내민 주민등록증을 꼼꼼하게 뒷면까지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마시라며 담배를 피워문 과장이 한 말은 간단했다. 성북서에서 이첩받은 건이다. 학내 소요가 큰 모양이다. 학생이 쓴 성명서로 소요 사태가 커졌다고 한다. 학교를 개혁하자는 학생의 생각에는 일견 동의한다. 그러나 4학년이다. 이제 곧 졸업이다. 더 나은 다른 방법을 찾을 기회다. 공부에 전념해라. “소요가 진정될 때까지 당분간 학교에 나가지 마라. 학교에서 알아서 다해줄 거다.” 그는 자신도 그런 때가 있었지만, “그 때 어른 말씀 듣고 공부했다. 경찰에 들어와 애 둘 낳고 산다. 현실을 직시해라. 인생 별거 아니다”라면서 내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았다. 말을 마칠 동안 내 옆에 앉은 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며칠 지나 아버지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손으로 내 머리를 쳤다. 그렇게 아프게 맞아본 일은 오랜만이었다. 노여움은 컸다. 경찰에 있는 지인이 줬다면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내가 쓴 글이었다. 며칠 전 경찰이 찾아와 알려준 학내 소요 사태를 일으킨 그 성명서였다. ‘대학을 혁신해야 한다’로 시작되는 글은 ‘우리의 요구’ 부분 맨 끝
미국과 캐나다 간 관세전쟁의 불씨를 스위스 초콜릿 브랜드 린트가 맞았다.4일(현지시간) 폭스비즈니스에 따르며 스위스 초콜릿 제조업체 '린트 운트 슈프륑글리'(린트·사진)가 그동안 캐나다에서 판매하는 초콜릿 제품을 미국과 유럽에서 각각 절반씩 생산해왔는데 관세전쟁 여파로 조만간 전량을 유럽에서 들여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날부터 캐나다에서 수입한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했고 캐나다도 맞대응에 나섰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이날 300억 캐나다달러(약 30조원) 상당의 미국산 제품에 25% 관세를 즉각 부과한다고 발표했다.현재 린트는 미국 내 5개 공장에서 미국 판매용 제품은 물론 캐나다 수출용 제품도 생산하고 있어 관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린트 대변인은 폭스뉴스 디지털과 인터뷰에서 "상황을 매우 면밀히 주시하고 있으며 관세 영향을 완화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어 "여기에는 유럽 생산시설에서 캐나다와 멕시코와 같은 국가에 공급할 가능성도 포함된다"고 덧붙였다.아달베르트 레흐너 린트 최고경영자(CEO)는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캐나다에 공급하는 물량의 전량을 유럽에서 조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운송 비용이 늘어나겠지만 관세로 인한 비용이 더 높을 것이라고 마틴 허그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로이터 통신에 설명했다.또 유럽에서 생산된 초콜릿 제품이 미국산보다 캐나다에서 소비자 반발에 덜 직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 방침 발표 이후 캐나다에서는 미국산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어지기도 했다. 캐나다는 린트의 10대 주요 시장 중 하
어느 분야나 빼어난 실력자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주목받는가 하면, 뒤늦게 재능을 꽃피우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기억되는 건 아니다. 예술도 마찬가지. 수많은 천재, 또는 기재들이 명멸하는 가운데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구축해낸 사람만이 오랜 세월 회자되기 마련이다.여기 스물셋 젊은 미대생이 1971년 ‘공심(空心)’이라 이름 붙인 회화 세 점이 있다. 창문 아래 한 여인이 누워 있는 평범한 그림인데, 점차 창이 일그러지더니 어느새 여인도 연기처럼 증발해버린다. 회화의 출발점이 현실의 재현(再現)이란 점에서 이 그림은 완성에서 미완으로 향하는 그림이다. 초현실주의 기법이 돋보이는 이 시리즈에선 회화의 본질을 허물고, 새롭게 바라보고자 하는 화가의 치열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신성희(1948–2009)는 이 삼부작으로 1971년 ‘제2회 한국미술대상전’ 특별상을 받았다. 김환기가 직전 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을 받아 잘 알려진 공모전이다. 촉망받는 작가로 인정받았지만, 그는 이후 주류를 벗어나는 행보를 보인다. 1960~1970년대 뜨겁게 달아 올랐던 실험미술에 뛰어드는 대신 회화에 몰두했다. 그렇다고 윗세대의 단색화를 추구하거나 아랫세대의 민중미술을 호응하지도 않았다. 신성희가 바라본 건 평면의 캔버스에 입체적인 공간을 구축해내는 ‘회화 너머의 회화’였다.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신성희 개인전 ‘꾸띠아주, 누아주’는 그의 40년 화업을 통해 독창적인 회화를 완성한 과정을 살펴보는 귀한 전시다. 가장 독창적인 화가 중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