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만인소' 다룬 신간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1792년 선비 1만명이 목소리 낸 이유는…만백성이 바란 '공론'
"감히 발을 싸매고 문경 새재를 넘어 피를 쏟는 듯한 정성으로 대궐 문에 부르짖습니다.

" (정조실록 1792년 윤4월 27일 기사)
1792년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앞으로 유생들이 모였다.

안동 하회마을을 비롯해 경상도 북부 곳곳에서 올라온 이들은 영남의 선비들이었다.

이들의 손에는 유학(幼學·관직에 아직 오르지 않았거나 과거를 준비하며 학교에 재학 중인 유생) 이우 등 총 1만57명이 연명한 상소가 있었다.

조선 최초의 '만인소'(萬人疏)다.

1792년 선비 1만명이 목소리 낸 이유는…만백성이 바란 '공론'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이 최근 펴낸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푸른역사)는 1792년 영남 유생들이 주도한 만인소를 생생하게 복원한 책이다.

정조(재위 1776∼1800)의 명에 따라 1792년 음력 3월 영남 남인을 대상으로 한 특별 과거시험인 '도산별과'가 치러진 일부터 이후의 정치적 갈등, 만인소 운동 과정 등을 추적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필사본 '천휘록'(闡揮錄)에 들어 있는 '임자소청일록'(壬子疏廳日錄) 기록을 바탕으로 사건을 소개하되, 역사적 장면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1792년 선비 1만명이 목소리 낸 이유는…만백성이 바란 '공론'
책은 29세의 젊은 안동 선비 류이좌(1763∼1837)을 중심으로 만인소 운동을 설명한다.

이 연구위원은 "'천휘록', '임자소청일록'의 저자가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저자 미상으로 처리돼 있지만, 학계에서는 당시 상소 운동에 참여했던 류이좌의 기록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책은 1792년 음력 윤4월 17일 류이좌가 하회마을을 떠나 상경하는 과정, 집단 상소를 준비하고 대표 격인 소두를 임명하는 절차, 각종 비용 등을 상세하게 전한다.

1792년 선비 1만명이 목소리 낸 이유는…만백성이 바란 '공론'
1만57명의 이름과 수결(手決·과거 성명이나 직함 아래에 도장 대신에 자필로 글자를 직접 쓰던 일)이 포함된 상소문은 대략 100m 전후로, 무게가 10㎏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영남 유생들은 왕에게 불손한 상소를 올린 대간(臺諫·비판을 주로 하는 언관의 직위를 의미) 류성한을 벌해야 한다고 청했으나, 그 이면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기호 노론을 향한 경계 목소리가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정조와 마주한 순간은 생생하게 표현돼 있다.

실록 기록에는 '이우가 상소를 다 읽자, 상이 억제하느라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여 말을 하려다가 말하지 못하였다'고 돼 있으나, 저자는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묘사한다.

1792년 선비 1만명이 목소리 낸 이유는…만백성이 바란 '공론'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눈물'이었다.

용안 위로 촛농을 닮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저자는 최종 결과는 아쉬울 수 있으나, 1만명이 모인 목소리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봤다.

이 연구위원은 "1만명이 연명하는 상소는 이후 중요한 역사적 변곡점에서 재야 유생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중요한 방법으로 정착되었다"고 강조했다.

"올바름을 향한 공론의 힘을 신뢰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던 이들의 노력이 역사의 전환점마다 다양한 형식으로 드러났다.

"
260쪽.
1792년 선비 1만명이 목소리 낸 이유는…만백성이 바란 '공론'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