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7공수여단 편의공작대 소속…"행불자 찾는데 돕겠다"
'사복 입고 주동자 연행' 44년 만에 사죄한 5·18 계엄군
"계엄군이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44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나마 5·18 유가족에게 사죄드립니다.

"
5·18 민주화운동 당시 7공수여단 소속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된 60대 A씨는 22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한 뒤 담담한 표정으로 속내를 풀어냈다.

그동안 시위 진압 임무에 투입됐던 특전사동지회 소속 계엄군들의 참배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5·18 당시 사복을 입고 정보수집 활동을 했던 편의공작대 출신 계엄군 참배는 A씨가 처음이다.

시민군과 대치하며 몸싸움을 벌였던 여타 계엄군들과는 달리 사복 차림으로 시민군으로 위장·시위 주동자를 찾아내는 편의공작대였던 그는 자신의 임무로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가슴 아파했다.

당시 자신이 계엄군으로 금남로 일대를 돌아다녔다는 사실만으로 광주 시민에 대한 죄스러움이 마음 한편의 짐으로 남았고, 이를 사죄·참회하기 위해 44년 만에 오월 영령을 참배했다.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참배단으로 이동하는 도중 눈물을 흘렸고, 이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고개를 연거푸 숙이며 "이제라도 사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고 말문을 열었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있던 부대 소속이었던 A씨는 비상계엄령이 전국에 선포된 1980년 5월 17일 늦은 밤 시위 진압을 목적으로 광주에 투입됐다.

투입된 지 2∼3일 동안은 전남대학교 후문에서 보초를 서거나 교내 수색 활동 임무를 맡아 시민군과 이렇다 할 접촉은 없었다.

하지만 전남 나주가 고향인 데다가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어 사복을 입고 시위대의 정보를 캐내는 사복조의 임무를 맡게 됐다.

'사복 입고 주동자 연행' 44년 만에 사죄한 5·18 계엄군
계엄군에 맞서 과격한 시위를 주도한 이들의 인상착의를 계엄군에게 전달했고, 같은 부대 소속 계엄군과 함께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계엄군들은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군용 트럭으로 끌고 갔다"고 말한 그는 눈을 감고 44년 전 그날을 한동안 회상하기도 했다.

시위대 정보 수집 임무를 맡았던 만큼 계엄군의 최초 발포 경위·헬기 사격 여부 등에 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A씨는 "계엄군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당시 기억을 떠올려 진술하는 것이다"며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찾아 유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특전사동지회는 이날 오후 A씨 등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3명과 함께 오월 영령에 참배했다.

헌화·묵념으로 오월 영령의 넋을 기린 이들은 행방불명자 묘역으로 이동했고, 묘역을 손으로 어루만지거나 절을 두 번 하기도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