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EU 등 파장 주시…서방 언론 "핵·가자전쟁 등서 이란 입장 변화 없을 것"
차기 권력구도 혼란 예상…가디언 "최고지도자 '세습'되면 내부 반발 커질 수도"
"누적된 혼란상, 서방 핵 제재·경제난·중동내 긴장 등 불확실성 고조 시점에 발생"
'시아파 맹주' 이란 대통령 사망에 중동정세 요동치나(종합)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헬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면서 살얼음판 같은 중동 정세에 또 한 번 시계제로의 격랑이 휘몰아칠지에 관심이 쏠린다.

라이시 대통령은 이란의 차기 최고지도자 1순위 후보로 거론돼온 강경 보수 성향의 인물이었다.

생전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에 이은 사실상 이인자로 꼽혔다.

지난 2021년 8월 취임 이후 근 3년간 시아파 맹주 이란의 초강경 이슬람 원리주의 노선을 이끌어왔다.

내부적으로는 지난 2022년 시작된 이른바 '히잡 시위'가 전국적인 반정부시위로 확산하는 가운데 이란 당국은 국제사회의 비판을 무릅쓰고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다.

이와 함께 라이시 재임 하의 이란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간 가자전쟁 국면에서 이른바 '저항의 축'으로 불리는 하마스,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 시리아와 이라크 내 친이란 민병대 등을 지원하면서 이스라엘과 미국에 군사적으로 맞서왔다.

특히 지난달 이스라엘의 주시리아 영사관 피폭 이후 이스라엘 본토를 사상 처음으로 보복 공격하는 등 대외적으로도 초강경 이미지를 굳혀왔다.

이런 강경 노선을 진두지휘해온 라이시 대통령의 부재는 7개월 넘게 이어져 온 가자전쟁 등 요동치는 중동 정세를 둘러싸고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시아파 맹주' 이란 대통령 사망에 중동정세 요동치나(종합)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은 물론 이란과 관계를 정상화한 수니파 맹주 사우디아라비아는 라이시 대통령의 헬기 추락 사고 후 실종부터 사망 확인까지 일련의 보도를 예의주시하면서 주요 파트너들과 향후 전개될 상황을 조심스레 예측하는 등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이란과 대척점에 서며 각종 제재 등을 주도해온 미국으로서는 11월 대선을 6개월 앞두고 불거진 돌발 상황이 미칠 여파에 대한 셈법이 복잡해 보인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사고가 이란 내부에 불러올 영향이 작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면서 히잡 시위 등 반정부 봉기 및 이란 유권자 수백만명의 지난 3월 총선 투표 보이콧이 보여준 집권 세력에 대한 불만 고조, 사상 최저치로 추락한 통화 가치나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통 등 미국의 제재로 인한 경제난 등을 불안 요소로 꼽았다.

분쟁 전문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ICG)의 알리 바에즈 이란 국장은 NYT에 "라이시 대통령 사망 시 이란은 부통령이 정권을 넘겨받아 50일 이내에 대선을 치러야 한다"면서 "이 상황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정통성 위기에 처해있고 역내에서 이스라엘 및 미국과 맞서고 있는 이란에 중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라이시 대통령 사후 이란의 정치 권력구도 변화에 주목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가 85세의 고령인 탓에 향후 몇 년 후로 예상되는 최고 권력 교체에 대비하던 이란이 최고지도자 계승 1순위로 꼽힌 라이시 대통령의 사망이 극심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디언은 특히 라이시의 사망으로 최고지도자를 하메네이의 아들인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이어받는 '세습'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며, 많은 이슬람 성직자들은 이를 이란 혁명 원칙에 반한다고 반대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짚었다.

현 정치 체제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투표를 포기하면서 3월 총선 결과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이후 처음으로 개혁파가 의회에서 사실상 배제된 상황에 대해서도 가디언은 "(이란이) 미지의 영역에 있는 나라라는 느낌을 더한다"고 평가했다.

'시아파 맹주' 이란 대통령 사망에 중동정세 요동치나(종합)
다만 이란 국영 TV 등이 일단 이번 헬기 사고의 원인을 기종 노후화와 악천후로 규정하고 있어, 사고의 원인을 둘러싸고 국가 간 갈등이 불거질 여지가 당장 높지는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또 최고지도자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이란에서 대통령의 부재로 정책의 주요 방향이 틀어질 가능성이 크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TV 연설을 통해 "이번 사고가 국정 운영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며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서방 언론 역시 이번 사고로 인해 이란이 대외 정책이나 태도를 갑작스레 바꾸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라이시 대통령이나 (헬기에 동승한)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외무장관이 사망하거나 무력화되더라도 핵 프로그램이나 가자전쟁에 대한 우려 등 뜨거운 지정학적 이슈와 관련한 이란의 입장을 변화시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 일간 예루살렘 포스트 역시 전문가들을 인용, 라이시 대통령의 사망이 이란과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 이란의 하마스 및 헤즈볼라에 대한 지원, 핵무기 생산 추진 등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이란이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역내 긴장을 임계점까지 몰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란은 최근 미국과 오만에서 고위급 간접 회담을 열어 역내 긴장 완화와 핵 프로그램 문제 등을 논의한 바 있다.

NYT는 가자전쟁뿐 아니라 지난달 이스라엘 본토에 대한 이란의 보복 공격에 이은 이스라엘의 반격 등과 관련, "지금은 이란에 특히 격동의 시기"라고 평가하면서도 이란의 보복 공격 당시 쏘아올린 미사일과 드론이 거의 대부분 격추된 것을 두고 사실상 의도된 것일 수 있으며, 이란이 전면전으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전문가의 분석을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동 정세의 불확실성은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가디언은 "(이란 내부에서 정치적으로) 누적된 혼란상은 핵 프로그램에 대한 서방의 도전, 경제난, 이스라엘 및 미국과의 관계와 연계된 다른 중동 국가들과의 긴장 관계를 직면한 이란이 이러한 불확실성을 감당할 수 없는 시점에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호세인 아미르 압돌라히안 외무장관이 이번 사고로 함께 숨진 것과 관련, 통제력과 예측 가능성을 자랑하던 이란에 불안감을 가중시킬 수 있고, 압돌라히안의 후임자로 유력 거론되는 알리 바게리 외무 차관에 대해 이란 내 강경파들은 핵 프로그램을 두고 지나치게 서방과의 협상만 하려 한다고 불만을 가질 수 있다고 가디언은 진단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