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은 인생의 동반자"…'쇼팽 권위자' 당 타이 손 6월 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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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에도 당당했던 베트남 대표 피아니스트…"쇼팽 배우려면 아시아로"
"쇼팽을 배우고 싶어요? 아시아로 오세요.
"
6월 내한 공연을 앞둔 베트남의 대표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쇼팽 권위자다.
1980년 제10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한 당 타이 손은 그 이후로 고집스럽게 쇼팽 연주에 몰두하고 있다.
그에게 쇼팽은 삶 그 자체인 셈이다.
당 타이 손은 18일 연합뉴스와 서면 인터뷰에서도 "쇼팽의 음악은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가까운 동반자다.
그의 음악으로 저를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다"며 쇼팽에 대한 열의를 내비쳤다.
쇼팽을 향한 그의 열정은 베트남의 1세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로부터 비롯됐다.
프랑스에서 음악학교에 다닌 어머니를 통해 자연스럽게 쇼팽을 접하게 됐다고 한다.
프랑스 음악을 이수한 그의 어머니와 프랑스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낸 쇼팽의 접점이 바로 당 타이 손 음악의 정체성이 된 것이다.
폴란드 출신인 쇼팽은 20세에 프랑스로 건너간 뒤 39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파리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프랑스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쇼팽이 폴란드어인 '쇼펜'(Szopen)이 아니라 프랑스어 '쇼팽'(Chopin)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 타이 손은 "제 문화적 뿌리는 프랑스 음악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제 어머니"라며 "쇼팽 또한 인생의 절반을 프랑스에서 보낸 프랑스 시민권자였다"고 말했다.
'낭만주의' 음악의 대가인 쇼팽을 흠모하지만, 당 타이 손의 음악은 '인상주의' 음악과도 밀접하다.
특히 드뷔시나 라벨, 포레 등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이 또한 인상주의 작곡가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한 쇼팽의 삶을 빼닮았다.
당 타이 손은 "드뷔시나 라벨 등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의 곡을 연주할 때 제가 가지고 있는 동양 문화의 덕을 가장 많이 본 것 같다"며 "'프랑스의 쇼팽'으로 불리는 프랑스 작곡가 포레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제는 세계적 유명세를 겪는 당 타이 손이지만, 그도 처음 쇼팽 음악을 시작했을 때는 백인 일색의 클래식계의 인종 차별에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당 타이 손은 "아시아 출신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이국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건을 겪어야 했다"며 "'서양인이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처럼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저에 대한 최악의 평가도 인종적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클래식계의 뿌리 깊은 차별의 시선에도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1980년 콩쿠르 우승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던 '아시아인 연주자'라는 편견을 묵묵히 견디며 음악 인생을 이어왔다.
또 교육자로도 활발히 활동하며, 제18회 쇼팽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인 브루스 리우를 키워내기도 했다.
그는 "이제는 클래식계 내에서 '쇼팽을 배우고 싶다면 아시아로 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며 "아시아 출신 음악가들의 존재감을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쇼팽 스페셜리스트' 당 타이 손의 리사이틀 공연은 6월 8일 대구 수성아트피아와 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진행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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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내한 공연을 앞둔 베트남의 대표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쇼팽 권위자다.
1980년 제10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한 당 타이 손은 그 이후로 고집스럽게 쇼팽 연주에 몰두하고 있다.
그에게 쇼팽은 삶 그 자체인 셈이다.
당 타이 손은 18일 연합뉴스와 서면 인터뷰에서도 "쇼팽의 음악은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가까운 동반자다.
그의 음악으로 저를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다"며 쇼팽에 대한 열의를 내비쳤다.
쇼팽을 향한 그의 열정은 베트남의 1세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로부터 비롯됐다.
프랑스에서 음악학교에 다닌 어머니를 통해 자연스럽게 쇼팽을 접하게 됐다고 한다.
프랑스 음악을 이수한 그의 어머니와 프랑스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낸 쇼팽의 접점이 바로 당 타이 손 음악의 정체성이 된 것이다.
폴란드 출신인 쇼팽은 20세에 프랑스로 건너간 뒤 39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파리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프랑스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쇼팽이 폴란드어인 '쇼펜'(Szopen)이 아니라 프랑스어 '쇼팽'(Chopin)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 타이 손은 "제 문화적 뿌리는 프랑스 음악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제 어머니"라며 "쇼팽 또한 인생의 절반을 프랑스에서 보낸 프랑스 시민권자였다"고 말했다.
'낭만주의' 음악의 대가인 쇼팽을 흠모하지만, 당 타이 손의 음악은 '인상주의' 음악과도 밀접하다.
특히 드뷔시나 라벨, 포레 등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이 또한 인상주의 작곡가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한 쇼팽의 삶을 빼닮았다.
당 타이 손은 "드뷔시나 라벨 등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의 곡을 연주할 때 제가 가지고 있는 동양 문화의 덕을 가장 많이 본 것 같다"며 "'프랑스의 쇼팽'으로 불리는 프랑스 작곡가 포레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제는 세계적 유명세를 겪는 당 타이 손이지만, 그도 처음 쇼팽 음악을 시작했을 때는 백인 일색의 클래식계의 인종 차별에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당 타이 손은 "아시아 출신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이국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건을 겪어야 했다"며 "'서양인이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처럼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저에 대한 최악의 평가도 인종적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클래식계의 뿌리 깊은 차별의 시선에도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1980년 콩쿠르 우승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던 '아시아인 연주자'라는 편견을 묵묵히 견디며 음악 인생을 이어왔다.
또 교육자로도 활발히 활동하며, 제18회 쇼팽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인 브루스 리우를 키워내기도 했다.
그는 "이제는 클래식계 내에서 '쇼팽을 배우고 싶다면 아시아로 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며 "아시아 출신 음악가들의 존재감을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쇼팽 스페셜리스트' 당 타이 손의 리사이틀 공연은 6월 8일 대구 수성아트피아와 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진행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