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은퇴 과학기술인 재능을 놓치지 않으려면
고경력 과학기술인은 지난 50년간 우리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발전의 기틀과 도약하는 법을 개발해 우리 사회가 오늘날의 우수한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기여했다. 일본어를 매개로 중역·삼중역을 거친 교과서를 읽으면서 기초를 배웠음에도 그 토대 위에서 선진국의 이론과 노하우를 습득했다. 지금 같다면 노벨상을 받아도 여러 번 받았을 법한 노력과 성과였겠지만 아쉽게도 그 시대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의 역량은 여전히 출중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융복합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여지도 매우 높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아차 하는 순간에 이들의 노하우와 지혜의 안목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정년제도, 플랫폼 부재, 그리고 노인에 대한 냉소적인 사회문화 맥락이라는 장벽이 위험 요소다. 관점과 절차의 긴급한 조율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사회 인식과 제도의 혁신이 긴요하다.

일례로 정년제도는 평균수명 60세 미만 시대에 만들어졌고, 21세기 선진국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일본도 65세 정년제도가 착근해 60~64세 고령자 취업률이 2000년 51%에서 2020년 71%로 치솟았다. 아울러 한국 사회에는 고경력 과학기술인에 대한 사회적 수요를 정교하게 연결하는 플랫폼도 없다. 노인과 장년들이 입만 열면 ‘라떼’ 운운하며 비아냥대 입을 닫게 하는 사회 분위기도 반성할 여지가 많다.

우선 국가 전략기술 차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과학기술인의 입장을 살펴보자. 그분들은 개인의 발전과 사회 발전,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을 동시에 향유했다. 누가 봐도 훌륭한 입지와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은 사실이다. 많은 분은 여전히 성장하고 숙성되고 있다. 인류의 자산이다. 그러나 혹여라도 정년제도의 날 선 칼날이나 다른 사회적 압력 탓에 성장 커브가 멈추면 어떡하나? 더 이상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사장된다면? 생각하기도 싫지만, 그분들이 경쟁국으로 간다면 또 어떻게 되겠는가?

현재 상황은 본인은 물론이고 아무도 알 수 없다. 대학이나 연구기관이 이분들을 계속 모시기 어려운 입장이라면 정부가 다만 몇 년간이라도 대학이나 연구기관을 지원해 이들의 연속적인 활약이 보장되도록 해야 한다. 한시적 정년 유예제도를 만들어 정년을 동결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잠시나마 시간을 벌고, 몇 년간 사회적 합의를 얻어가면서 시스템을 정비한 후 우수 전략 기술 과학기술자들이 계속해서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놔야 한다. 이런 담론을 마련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사회의 역량이며 정부나 정치권이 고뇌해야 할 과제다.

한국 기업과 산업, 그리고 사회문화에 새로운 방향이나 가벼운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는 수준의 과학기술인은 수없이 많다. 그분들과 산업 및 사회를 연결해 과학기술 지식과 발견, 발명이 기업이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여전히 중소기업 중에는 혁신이나 과학기술 수준이 우리 사회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다. 포장재, 가공 방법상의 위생, 재료의 배합이나 유지 등 단순한 기술적 영역에서도 발전과 혁신의 여지가 크다.

사회 전반의 과학·기술·문화적 호기심 등의 수준도 매우 낮다. 며칠 전 역사적 개기일식 때 비록 미국에서밖에 관측될 수 없었다지만 우리 국민 대부분은 외신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했다. 반면 미국인 상당수는 개기일식 관찰 가능 라인을 따라서 여행을 즐겼다.

비교적 여유가 있을 은퇴 과학기술자들을 산업, 소셜미디어, 과학문화와 연결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정교하면서도 방대한 디지털 플랫폼을 개발해 보면 어떨까 한다. 이를 통해 과학기술인을 고용하거나 초대하고 경영 컨설팅을 받을 수 있게 하고 또 이에 적극적인 중소기업이나 매체들을 지원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경우 청년 대상의 다양다기한 정부 프로그램보다 더 의미 있고 즉각적인 효과가 발생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중소기업이 살아나면 청년에게도 기회가 되는 것이다. 사회의 인식이 혁신을 지향하고 그 효과에 대해 도전적이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현실적인 방안을 추구하는 단계로 훌쩍 성숙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