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지나 봄꽃 피도록 임시주택 머무는 이재민들의 고된 삶
산림 120㏊ 소실…벌거숭이 산에 침엽수·활엽수 혼합림 조성
[르포] '강릉산불 1년' 아물지 않은 상처 위 다시 돋는 희망
지난해 봄, 몸을 가누기 힘든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강원 강릉시 경포 일원을 덮쳤던 산불은 기적처럼 쏟아진 빗줄기에 반나절 만에 꺼졌다.

하지만 집들이 불탄 까닭에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고 화마에 일터를 잃은 이들은 생계가 어려워졌다.

검게 그을린 산은 벌거숭이가 돼 다시 푸르러지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다시 계절이 네 번 지나 봄이 왔고 불타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 옆으로 진달래가 활짝 폈다.

상처가 아물어 갈 시간이지만 이재민들의 생활 속 어려움은 더디게 나아져 간다.

[르포] '강릉산불 1년' 아물지 않은 상처 위 다시 돋는 희망
◇ 엄동설한 보낸 이재민…어린 딸 마음엔 아직 상처가
"공사 소리에 시끄럽고 먼지도 많이 날리고…애들도 같이 사는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에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다들 다시 살아보려고 애쓰는 건데 조금씩 참고 양보해야죠."
8일 강릉시 저동 임시 주택에서 만난 최영주(44) 씨는 집 앞에서 분주히 이뤄지는 건물 공사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거기에는 최씨처럼 작년 산불에 집을 잃은 이웃이 새롭게 집을 짓고 있었다.

주위에는 벌써 거의 다 지어진 집이나 펜션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최씨 역시 사천면에 새집을 짓고 있다.

12살·8살 어린 딸들도 어서 컨테이너가 아니라 어엿한 집에서 살길 기다리고 있다.

올겨울은 최씨를 비롯한 여러 이재민 가정에 혹독했다.

그가 머무는 임시 주택은 올겨울 땅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전기 패널이 고장 나 바닥 절반가량이 냉골이었다.

[르포] '강릉산불 1년' 아물지 않은 상처 위 다시 돋는 희망
혹여 아이들이 감기에 걸릴까 보온 단열재를 구해 벽에 붙였고 입구에 방한 비닐까지 붙여 추위를 쫓았다.

어린 딸들이 아직 집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은 그를 더욱 힘들게 한다.

최씨는 "여덟살짜리 작은딸이 아직도 '하늘나라에 가면 토끼 인형을 만날 수 있어'라고 묻는다"며 "엄마는 (산불로 잃어버린 것 중에) 뭐가 제일 아깝냐고 묻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씨가 머무는 컨테이너 옆에는 짙은 분홍의 봄꽃이 만발했다.

그는 꽃에 맺히는 봄비를 찬찬히 바라봤다.

공사장 소음은 이따금 귓전을 때렸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꽃에 머물렀다.

[르포] '강릉산불 1년' 아물지 않은 상처 위 다시 돋는 희망
◇ 쥐꼬리 같은 보상에 두 번 우는 임대 펜션업주들
최씨 집 앞 공사장 너머로 큰길을 따라가다 보면 경포 펜션촌이 보인다.

이곳 역시 산불로 큰 피해를 본 곳이다.

지금은 흉하게 탄 건물은 대부분 철거됐고, 올여름 손님을 받고자 새로 지어지는 펜션들이 완공됐거나 거의 다 지어진 모습이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업체 관계자들의 여전한 고통이 있다.

2020년부터 사근진해수욕장 인근에서 펜션을 운영하던 이모(36)씨는 지금 포장마차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펜션을 다시 운영하고 싶어도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씨가 운영하던 펜션은 주인이 따로 있었고 자신은 임대로 들어간 까닭이다.

[르포] '강릉산불 1년' 아물지 않은 상처 위 다시 돋는 희망
인테리어에만 1억원 이상 썼어도 이는 모두 매몰 비용이 됐다.

불탄 펜션에 관한 보상은 모두 건물주 몫이었고 이씨는 펜션에 투자한 비용의 10분의 1가량 되는 보상금만 받을 수 있었다.

이는 경포에서 임대로 펜션을 꾸려나가던 젊은 업주들 대다수가 겪은 현실이다.

이씨는 "나는 그래도 포장마차를 차릴 여력이라도 있었지만, 많은 젊은 펜션 업주들이 무직으로 지내며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고 있다"며 "규정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 보상이 필요하다"고 하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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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벌거숭이 언덕에 활짝 핀 봄꽃…산림 조성 한창
1년 전 검게 탔던 소나무들은 대부분 베어져 경포 곳곳의 산림이 벌거숭이가 된 모습이다.

당시 불길은 강풍을 타고 축구장 170개와 맞먹는 산림 120.69㏊를 태웠다.

시와 산림 당국은 산불 확산을 최소화할 수 있는 숲으로 복구를 추진, 해안가에는 해송과 벚나무를, 내륙으로 갈수록 소나무와 산수유, 산벚나무, 밤나무 등 활엽수를 심고 있다.

지금은 대부분 묘목이 심겼으며, 침엽수와 활엽수를 1대 4 비율로 섞은 혼효림(혼합숲)을 조성하고 있다.

강릉 곳곳에는 산불로 타서 베어낸 아름드리 소나무 그루터기들 사이로 꽃이 활짝 펴 봄이 돌아왔음을 온몸으로 알렸다.

[르포] '강릉산불 1년' 아물지 않은 상처 위 다시 돋는 희망
한편 산불과 관련해 한전의 과실 여부를 수사 중인 강릉시 산림특별사법경찰은 산불 발생 이후 현재까지 한전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총 네 차례에 걸쳐 참고인 조사를 진행했다.

또 한전 측에 여러 차례 관련 자료를 요청해 전신주에 쓰인 제품들이 적정한 규격인지, 관리지침 등을 충실하게 이행했는지 등을 집중해서 들여다보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한국산불방지기술협회 모두 '강풍에 쓰러진 나무에 의한 전선 단선'이라는 감정 결과를 내놓은 가운데 한전 측은 한국전기설비규정에 따라 전선을 설치한 점을 들어 잘못이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수사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재민들은 수사가 장기화하자 지난 3일 춘천지법 강릉지원에 한전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최양훈 강릉산불 비상대책위원장은 8일 "피해 주민들은 속이 타고 있는데 한전은 연락도 없다"며 "한전은 민·형사상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르포] '강릉산불 1년' 아물지 않은 상처 위 다시 돋는 희망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