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영과 아르떼필하모닉의 시벨리우스는 차갑고 예리했다
북구의 빙하처럼 푸른빛을 발하는 장엄하고 신비한 울림, 그것이 지휘자 이병욱이 한경 아르떼필하모닉이란 프리즘을 통해 구현한 바그너의 세계였다.

오페라 '로엔그린'은 바그너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바그너 음악인생의 초기를 마감하고 원숙기를 예고하기 때문이다. 이번 연주회의 첫 무대를 장식한 '로엔그린' 1막 전주곡은 바그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경 아르떼필하모닉의 원숙기를 예고하는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지난 28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3월 정기연주회에서 이병욱과 한경 아르떼필하모닉이 펼쳐놓은 신비한 울림의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겨보자.

고음에 피아니시모(매우 약하게)로 균질한 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연주자에게 대단한 고역(苦役)이다. 그렇기에 '로엔그린' 1막 전주곡은 시작부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프레이즈(멜로디 라인) 안에서 피아니시모에서 피아노로 크레센도(점점 세게)까지 표현해야하는데다 집중력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신비한 울림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모든 부분이 맞아떨어졌을 때의 감동은 상당하다. 침묵에서 출발하는 바그너의 음악은 순식간에 청중들에게서 몰입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서서히 풍성함을 더하며 쌓아올린 드라마는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자연스럽게 카타르시스로 이어졌다.

이어진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병욱과 한경 아르떼필하모닉이 구축한 세계에 한층 깊이를 더했다. 바그너와 마찬가지로 시벨리우스 또한 극도의 피아니시모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비로운 바이올린의 음형은 빙하 아래로 흐르는 거대한 강처럼 객석을 서서히 잠식해 나아갔다. 이어 솔리스트로 무대에 오른 바이올리니스트 윤소영의 연주는 차갑고 예리했다. 시벨리우스 특유의 희뿌연 사운드와 대비를 이루며 연주에 입체성을 부여했다. 또한 이병욱은 두터운 저음현을 바탕으로 윤소영의 첨예한 연주를 감싸 안았다. 만약 독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모두가 날선 연주를 들려줬다면 순간적인 음향효과는 빛을 발했겠지만 전체 연주를 두고 봤을 땐 다소 피로했을 수 있었다.
윤소영과 아르떼필하모닉의 시벨리우스는 차갑고 예리했다
윤소영의 연주에서 주목할 점은 2악장이라고 할 수 있다. 1악장이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대화를 주고받는 방식이라든지, 장대한 카덴차와 환상적인 사운드로 주목을 끄는 반면, 2악장은 3악장을 향해 가는 여정의 경유역 같은 인상을 받곤 한다. 하지만 윤소영은 오히려 2악장에서 더욱 농밀한 연주를 들려줬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1악장의 서늘한 심상이 다소 희석되는 인상도 있었지만, 착실하게 드라마를 쌓아올렸기에 3악장에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영국의 음악학자 도널드 토비는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3악장을 가리켜 “북극곰들을 위한 폴로네이즈”라고 표현한 바 있다. 토비의 표현은 이 곡의 3악장이 가진 특징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바로 춤곡이라는 점이다. 작곡가는 3악장 도입부에 알레그로(Allegro·빠르게)라고 템포를 표시하며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ma non tanto)'고 단서조항을 달았다. 너무 빠르게 연주할 경우 리듬감이 둔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연주에서 이병욱과 윤소영 그리고 한경 아르떼필하모닉이 중용적인 템포를 유지한 것도 어쩌면 3악장의 리듬을 염두에 둔 선택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프레이즈를 될 수 있으면 길게 가져가는 윤소영의 해석도 인상적이었다. 최근 들어 악센트를 다채롭게 구사하기 위해 프레이즈를 짧게 설정하는 연주자가 많다. 아무래도 악센트는 프레이즈 시작 부분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레이즈를 길게 설정한 윤소영의 연주는 묵직한 리듬 사이에서도 우아함을 선사했다.

연주회의 메인 프로그램은 생상스 '교향곡 3번 오르간'이었다. 이날 연주회 프로그램의 공통점 중 하나는 현악의 피아니시모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바그너의 <로엔그린> 1막 전주곡,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물론 생상스의 교향곡까지 침묵에서 출발해 거대한 울림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드라마를 쌓아올려야만 하는 구성이다.
윤소영과 아르떼필하모닉의 시벨리우스는 차갑고 예리했다
한경 아르떼필하모닉의 현은 밀도 높은 소리로 이병욱의 지휘봉에 반응했다. 현에 이어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그리고 플루트로 이어지며 쌓아올린 음률의 성당은 1악장 12마디에 이르러 격렬함을 더했다. 이 곡의 첫 주제는 그레고리안 성가 진혼곡 '진노의 날'을 사용하고 있는 만큼 이병욱은 어둡고 심각한 분위기로 연주를 이끌었다. 초반의 어둠이 짙을수록 피날레가 눈부시게 빛나기 마련이다.

1악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오르간의 울림은 연주의 국면을 순식간에 전환했다. 고요하고 경건한 오르간의 지속음이 어둠을 진정시킨 까닭이다. 이날 오르간 연주를 맡은 신동일과 이병욱의 호흡이 인상적이었다. 오르간이 제시한 주제와 이를 이어받는 오케스트라의 음색의 균형이 절묘했다. 이병욱은 각 관악기의 음색을 분리시키기보다 한데 엮어 흡사 오르간과 같은 음향을 구사함으로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르간과 악단의 다이내믹은 피아노에 불과하지만 홀을 가득 채우는 풍성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2악장 후반부가 시작 부분엔 악보에서 따로 다이내믹 지시가 없다. 대신 작곡가는 겹세로줄로 2악장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분리함으로 전혀 다른 피날레의 국면의 전환을 알린다. 여기서 이병욱은 이전 프레이즈의 잔향이 충분히 잦아들도록 숨을 고르고 피날레를 향해 무직한 걸음을 내딛었다. 진노의 날의 어둠을 딛고 빛에 이른 연주는 찬란했다. 무엇보다 이날 한경 아르떼필하모닉의 현악 편성은 다소 작은 편이었다. 콘트라베이스가 6대 배치됐다. 그럼에도 오르간의 울림에 묻히지 않고 제 목소리를 냈던 부분에서 최근 들어 물이 오르고 있는 한경 아르떼필하모닉의 연주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윤소영과 아르떼필하모닉의 시벨리우스는 차갑고 예리했다
한경 아르떼필하모닉은 내달 10일 교향악축제 무대에서 말러 '교향곡 5번'을 연주한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력을 시험하는 듯한 난곡이지만 이날 연주회에서 보여준 연주력이라면 훌륭한 무대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오페라 '로엔그린'이 바그너의 원숙기를 예고한 것처럼, 오는 교향악축제 무대는 한경arte필하모닉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