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이는 경동시장의 모습. 과일을 저렴하게 판매한다. /사진=김영리 기자
북적이는 경동시장의 모습. 과일을 저렴하게 판매한다. /사진=김영리 기자
"자 지금부터 2개 8000원! 몇 개 안 남았어요. 어머니, 이거 2개 8000원에 가져가셔."

21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위치한 경동시장. 오후 2시가 되니 시장 내부 청과물 구역에서 과일 상회를 운영하는 한모(30) 씨는 '500g 딸기 2팩 1만원'이라고 적혀있는 팻말을 젖혀두고 "여기 있는 거 이제 2팩 8000원"이라며 목청껏 '떨이'를 외쳤다.

파장 세일에 돌입하자 주위에 있던 주부들이 하나둘씩 딸기 매대 앞으로 몰렸다. 한 씨는 무르지 않은 딸기를 골라주면서 "오늘은 평일이라 사람이 많이 없는 편"이라면서 "오늘따라 물건이 많이 남아 일찍 떨이에 들어간다"고 부연했다.

한 씨는 평일엔 오후 4시 30분, 주말엔 오후 6시쯤부터 파장 떨이를 한다고 했다. 그는 "요즘에는 그 시간대만 노려 찾아오시는 손님도 많다"며 "여긴 경쟁 점포가 많아 그렇게 해서라도 다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과일 매대에서 1만5000원짜리 선물용 딸기를 구매한 70대 서모 씨는 "신반포역에서 왔다"며 "딸기는 이 집이 맛있더라. 마트에서 이 정도면 2만원은 넘을 것"이라며 저렴한 가격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어 "시장이라고 모든 점포가 다 싼 건 아니"라면서 "여기저기서 조금씩 사본 다음 물건별로 가장 품질 좋은 곳을 기억해두는 것이 좋다"며 '장보기' 팁을 귀띔하기도 했다.
떡, 빵, 옥수수 등 간식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었다. /사진=김영리 기자
떡, 빵, 옥수수 등 간식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었다. /사진=김영리 기자
경기가 둔화하면서 불황형 소비가 늘어나는 가운데, 평소 대형 마트보다 가격이 더 저렴하다고 여겨지는 전통시장에서도 가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저렴하다고 소문난 곳은 발품을 팔아서라도 찾아가고, 이젠 '파장 세일'처럼 시간대까지 고려하는 모양새다. 특히 최근 비싸서 못 먹는다는 과일은 흠과가 되려 더 잘 팔린다는 후문이다. 물건을 최대한 저렴하게 사려는 소비자 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경동시장을 찾은 시민들 대부분 중장년층이었으나 곳곳에 청년들도 눈에 띄었다. 각종 한약재를 파는 약령시까지 붙어있어 없는 게 없었다. 1호선 제기동역부터 청량리역 일대가 모두 시장으로, 약 23만5500㎡의 면적을 갖춰 서울 전통시장 중 가장 넓다.

특히 경동시장은 가격이 저렴하다고 소문난 곳이다. 날마다 들려오는 '물가 상승', '고물가'라는 뉴스를 보란 듯이 저렴한 가격으로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튀김만두 30개에 1만원, 도넛 10개 2000원, 떡 1팩에 1500원, 찐 옥수수는 4개 3000원이었다.

10개 3만원에 팔려 '금값'이 됐다던 사과(부사)도 평균 6개 1만원에 판매됐고, 흠집이 나거나 작은 사과는 8개 1만원에 나오기도 했다. 대형 마트에서 9000원대에 판매하는 500g 딸기 1팩은 5000원이고, 1kg은 9000~1만원 수준이었다. 거의 반값인 셈이다.

알이 작아 '주스용'이라고 부르는 딸기를 1상자 3000원에 판매하던 상인 이모 씨는 "요즘에는 주부들도 많이 사간다"며 "어떨 때는 질이 좋은 물건보다 잘 팔리는 날도 있다"고 전했다.

다른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30대 박모 씨도 "천안, 인천에서 오시는 분도 많다"면서 "어르신 분들은 교통비가 안 드니 구경 삼아 오셔서 저렴하게 장도 보신다"며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주말엔 150명까지 줄을 선다는 유명 순댓집. /사진=김영리 기자
주말엔 150명까지 줄을 선다는 유명 순댓집. /사진=김영리 기자
앞서 경동시장은 젊은 층 사이에서도 화제된 바 있다. 한 순대 가게에 인기 유튜버 등이 방문해 "10년 전 물가"라며 저렴한 가격을 보여주면서다. 이 가게에선 순대가 1kg당 4000원에 판매됐다. 간과 허파는 손바닥보다 큰 한 덩이가 1000원, 머리 고기 반 마리는 1만2000원이었다.

이날도 15명 정도의 시민들이 꾸준히 가게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편육과 같은 일부 제품은 이미 품절이었다. 이곳 순대를 소개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게시물을 보고 찾았다는 30대 조모 씨는 "가격이 정말 저렴하길래 먹어보려고 왔다"며 "사실 광장시장이 바가지로 소문난 바람에 전통시장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오늘 경동시장이 선입견을 깼다"고 말했다.

순댓집 사장인 50대 김모 씨는 "젊은 분들이 이런 음식을 좋아할 줄 몰랐다"며 "주말에는 젊은 분들이 더 많은데, 아침부터 최대 150명까지도 기다리시더라"라고 전했다. 이어 "순대 가격은 10년간 500원 올렸다"며 "박리다매로 운영하는 곳이라 많이 찾아주실수록 감사할 따름"이라고 전했다.

허경옥 성신여대 생활문화소비자학과 교수는 "경동시장의 경우 경쟁 점포가 워낙 많아 원래도 물건이 비교적 저렴한 곳"이라며 "다만 서울 도심서 떨어진 곳에 있어 다른 전통시장에 비해 접근 경쟁력이 떨어지는데, 이젠 그런 한계를 극복할만큼 가격적 이점이 중요해진 것"으로 분석했다.

특히 "파장 세일을 노리는 소비 형태는 영업시간이 정해진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자주 보이던 것인데, 이제 이 방법을 전통시장에서까지 적용하고 있다. 그만큼 시민들이 물가 부담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며 "흠집이 있는 과일이 인기인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인근 도로 정비나 주차 공간을 확보하면 더 많은 소비자들이 경동시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기회에 경동시장이 퇴색된 정통시장 이미지를 쇄신하는 곳으로 자리잡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김영리 한경닷컴 기자 smart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