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주식시장 발목잡는 '한국판 행동주의'
월스트리트의 르네상스 맨. 올해로 창사 20주년을 맞는 헤지펀드 퍼싱스퀘어캐피털매니지먼트(PSCM)의 창업주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빌 애크먼을 가리키는 말이다. 금융업에서 시민운동까지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던 애크먼이 부와 명성을 쌓은 원동력은 행동주의 투자였다. 행동주의는 경영진과 이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기업 가치와 주가를 높여 수익을 올리는 전략을 추구한다. 20세기 초반 태동한 이 투자 기법은 오랜 기간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더 이상은 아니다. 조지프 풀러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교수의 지적과 같이 미국의 경우 행동주의 펀드는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환골탈태했다. 주(州) 정부 연금펀드와 같은 메이저 기관투자가들의 파트너가 됐다. ISS와 글래스루이스 같은 글로벌 의결권 자문회사엔 신뢰의 대상이다.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유명 대학에서는 행동주의 강의 열풍이 불고 있다. 평판이 개선된 데에는 애크먼을 필두로 한 금융인들의 혁신 노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애크먼의 투자 전략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장기 투자를 통한 발언권 확보를 중요시한다. 애크먼은 소수의 저평가된 우량 기업에 집중 투자한다. 대형 철도 회사인 캐나디안퍼시픽레일웨이(CP)처럼 경기의 부침에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창출하는 기업을 선호한다. 이들에 대해 다년간 주식을 사들여 지분을 늘린다. 경쟁 투자사들과의 협업에도 공을 들인다. 보유 지분이 많을수록 기업 운영 방향에 대한 목소리가 커진다고 믿는다.

둘째, 기업 체질과 투명성 업그레이드를 주도한다. 두 자릿수 지분을 매집한 뒤에는 개혁을 단행한다. 이사회에 참가하거나 외부에서 전문경영인을 영입한다. 경영 전략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한다. 다른 업체들보다 매출이 적을 경우 해법을 제시한다. 분할 매각을 추진하는 등 구조조정을 하고 인력 재배치를 통해 비효율적인 조직을 재편한다. 중장기적으로 기업 경쟁력을 개선해 투자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이 같은 애크먼의 투자 전략은 국내 행동주의 펀드의 투자 전략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토종 자산운용사의 특징은 두 가지다. 첫째, 적은 지분만으로 여론몰이에 의존한다. 단기 투자로 발언권 확보를 소홀히 한다. 2021년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투자 기업 주식을 10% 이상 취득해 6개월 이상 보유해야 하는 의무가 사라지며 이런 성향이 심화했다. 협업에도 서투르다. 지분 분산 수준이 높으면 공동 행동이 중시되지만 이를 경시한다. 주주제안 통과 실패를 자초해왔다.

둘째, 머니 게임에 치중한다. 기업 경영 관행이나 지배구조를 유의미하게 변화시킨 사례는 드물다. 올해 초 발표된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의 제안과 같이 잉여현금 규모를 초과하는 배당 및 자사주 소각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다. 이로 인해 주가 급등락을 불러온다는 지적이 나온다. 투자 재원을 잠식해서 성장동력 확보를 막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기업가정신을 위축시키고 최악의 경우 경영권 보호를 위해 상장 폐지를 고려하게 한다.

최근 수년간 한국 행동주의 펀드는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주주행동주의 대상 기업은 2021년 34곳에서 2022년 37곳, 작년에는 73곳으로 빠르게 늘었다. 이런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저성장 기조 고착화와 개인투자자의 폭증이 우호적인 시장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성장이 둔화되면 기업 실적이 타격을 받고 주가는 정체 또는 하락한다. 투자자에게 “수익을 늘려주겠다”는 행동주의 캠페인이 힘을 얻게 된다.

이와 관련, 빌게 일마즈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교수의 “행동주의 투자는 양날의 칼”이라는 지적을 경청해야 한다. 주주행동주의는 기업의 재탄생을 돕는 ‘약’이 될 수도, 우수 회사의 쇠락을 야기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 행동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최소화하고 긍정적 기능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 개편 못지않게 업계 종사자들의 자기 개혁이 요구된다. 한국 주식시장에도 애크먼에 버금가는 행동주의 혁신가가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