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한경DB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한경DB
‘당나라 군대’.

흔히 ‘오합지졸(烏合之卒)’을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강성했다는 당나라의 군대가 규율 없고 군기가 빠진 병졸들을 상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당나라군이 고구려·신라와의 전투에서 패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에서부터 청일전쟁,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군을 비하해 부른 말에 뿌리가 있다는 해설까지 다양한 주장이 인터넷을 떠돌지만 확실한 어원이 밝혀진 것은 없는 듯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역사상 실재했던 당나라군은 '유약한 군대'로 단순히 깎아내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남아있는 자료가 중국 측 자료 일색이어서 왜곡의 소지가 적지 않지만, 고구려 역사상 최대 패전 중 하나로, 흔히 주필산(駐蹕山)전투로 불리는 안시성 회전에서 고구려군의 참패를 불러온 것은 당나라 군대의 일사불란한 규율이었다.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침공군을 조직해 요동 지역을 침입한다. 대(對)고구려전에 투입된 당군의 전체 군세는 (고구려에 패해 당 태종의 명성에 누를 끼친 탓에) 명기된 기록이 전하지 않지만 2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요동성과 백암성 등을 압도적 군사적 역량으로 제압한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 인근에서 고구려 주력부대와 대면하게 됐다.

북부 욕살(褥薩) 위두대형(位頭大兄)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대형(大兄) 고혜진(高惠眞)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15만명에 달했다. 이들 고구려 중앙군은 전국 각지의 성에서 차출한 병력과 휘하 말갈족의 여러 부족에서 동원한 병력을 합친 것이었다. 노태돈 전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이는 고구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 동원이었다.

전투에 앞서 열린 전략회의에서 경험 많은 노장인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 장군은 “당군은 수나라 말기 이래로 오랜 전란과 대외원정으로 단련된 정예군인 만큼 예봉이 날카롭고 사기가 높으므로 정면 대결을 피하고 방어에 주력하는 지연전을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반(反)연개소문파가 장악하고 있던 안시성과 달리, 연개소문 정파에 속해 젊은 나이에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던 고연수, 고혜진 등 상대적으로 젊은 고구려군 지휘부는 이를 거부한다. 대신 안시성 근교 평원으로 진군해 당군과 일대 회전을 통해 단판에 승부를 결정짓는 전략을 선택한다.

당시 양국 간 자웅을 겨룰 안시성 회전에서 양군의 군세는 비슷했다. 고구려 전선에 투입된 당군은 20여만이었지만 그중 일부는 개모성이나 요동성 방면에 주둔하며 방어하고 있었고, 일부는 요동 방면에 있었기 때문에 최대 16만명을 넘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당군도 고구려군에 대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보장왕 8년 4월)에 남은 유공권의 기술에 따르면 “고구려 군대가 말갈과 군대를 합쳐서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였다. 황제가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我軍與靺鞨合兵爲陣, 長四十里, 帝望之, 有懼色)”고 전해진다.

고구려군에는 중장기병이 많아 고구려군이 입은 명광갑(明光甲·표면에 황칠을 한 갑옷)에 반사된 번쩍이는 빛이 사방을 압도했고, 40여리에 뻗친 고구려군의 행렬이 당군에게 위압감을 줬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고구려군을 상대하는 당 태종 이세민은 노회했다. 정면 대결에 나선 고구려군을 접한 이세민은 결전 전날 고구려군에 사자를 보낸다.

사자가 전한 당 태종의 전갈은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인 것을 문죄하러 왔을 뿐 교전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我以爾國強臣弑其主, 故來問罪, 至於交戰, 非吾本心)”며 “고구려가 신하의 예를 다한다면 점령한 성을 모두 돌려주겠다(俟爾國修臣禮, 則所失必復矣)”는 기만책이었다.

막상 결전을 앞두고 상대가 부드러운 말로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자 고구려군은 은연중 자만하는 입장이 됐다.

이튿날 날이 밝자 양군은 전투에 돌입했다. 이후 전투 양상에 관한 구체적 기록은 <구당서>나 <자치통감> 등 전투의 승자인 당나라 측 기록만 일방적으로 남아있다. 왜곡의 소지가 적지 않지만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당 태종 이세민은 이적(李勣)이 이끈 당나라 선봉군에게 고구려군과 교전 뒤 밀리듯 후퇴하면서 당군이 매복한 계곡으로 유인하도록 했다. 고구려군이 이 계략에 넘어가자 당 태종은 장손무기(長孫無忌)가 거느린 당군으로 고구려군의 배후를 돌아 기습토록 했다.

당시 전진하던 고구려군은 이적의 당군을 제압하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고구려 기병이 당군을 향해 돌진했지만, 당군의 장창대(長槍隊) 1만명에게 저지당했기 때문이다. 긴 창의 뒷부분을 땅에 박아 고정한 뒤 달려오는 말의 가슴이나 목을 노린 장창은 돌진하는 기병이 낙마하면 뒤에 오는 대열까지 밀리도록 해 기병, 특히 고구려 중장기병의 위력을 반감시켰다.

기병의 장점인 기동성이 상실되자 가지 달린 창인 극을 지닌 중장보병이 기병을 포위해 찌르고 말에서 떨어뜨렸다.

오랜 실전경험으로 엄정한 대오를 유지한 당나라 장창병에게 고구려의 자랑인 기병이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고구려군은 크게 당황했다. 앞으로 전진도 못 하는 상황에서 뒤로 물러서려니 이미 장손무기의 당군이 퇴로를 차단한 상태였다.

결국 포위망에 빠진 고구려군은 당군에 의해 몇부분으로 절단돼 차례로 제압당했다. 대략적인 전투 내용만 전하는 <삼국사기>는 “우리 군대는 풀잎처럼 쓰러졌다(我軍披靡)”고 전한다.

결국 고연수, 고혜진 등 고구려군 지도부는 항복했다. <삼국사기>는 “죽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고 전한다. 이때 항복한 고구려군 가운데 장교만 3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나라는 이들을 모두 중국 내지로 옮겼고, 함께 항복한 말갈인 3300인은 모두 파묻어 죽였다. 이 전투에서 당군은 명광갑 갑옷 1만개와 소와 말 각각 5만필을 노획했다고 전해진다.

결론적으로 고구려 중장기병의 약점을 철저히 노린 전술에 말려들면서 고구려는 총력을 기울여 조성한 주력군을 단번에 상실했다. 고구려 조정에 심리적 공황 상태가 닥쳤다. 이에 따라 인근 후황성(后黃城)과 은성(銀城)의 주민들이 성을 포기하고 달아나는 사태도 발생했다.

하지만 고구려로선 천만다행으로 당군은 이 같은 상황을 적극 활용해 신속한 진격을 하지 않는 전략적 실수를 범하게 된다. 여기에 당군의 오랜 포위에도 불구하고 전략 요충지인 안시성을 함락하는데 당군은 끝내 실패했다.

최근 막을 내린 중국 최대 정치 행사 양회(兩會)에서 중국 군부 서열 3위인 허웨이둥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군의 ‘가짜 전투력(fake combat capabilities)’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해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중국군 최고위 인사가 공개적으로 군의 ‘치부’를 언급한 것이 이례적이라는데. 형식주의와 관료주의, 부패가 만연한 중국군의 장비와 훈련 수준이 대만을 침공하기엔 아직 미흡하다는 걸 자인한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실제 중국군의 현실을 두고 “서부 사막지대에 배치된 미사일 액체 연료통이 연료가 아닌 물로 채워져 있었고, 핵미사일 지하 격납고는 발사용 덮개가 고장 나 있었다”는 식의 서구 언론 보도도 잇따른다.

다만, 중국 군부 내 부패가 만연했고, 대외적으로 공개된 중국군의 전력이 과장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중국군을 얕봐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상대를 만만한 ‘당나라 군대’로 여겼지만, 막상 규율이 잘 갖춰진 적군을 만나 참패했던 고구려의 역사가 오늘날 반복돼선 안 되기 때문이다. 상대를 ‘당나라 군대’로 여기고 만만하게 여기는 순간, 자신이 규율 없는 허울뿐인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역사가 전하는 교훈일 것이다.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