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극장가에서 영화 ‘파묘’가 흥행 독주하며 관객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가운데 기대를 모았던 ‘패스트 라이브즈’의 존재감은 갈수록 옅어지는 분위기다.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인 ‘인연’의 개념이 낯설지 않은 국내에선 상대적으로 소구력이 떨어진다는 반응이다.

15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패스트 라이브즈’는 전날 3134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순위 6위를 기록했다. 지난 6일 개봉한 이후 9일간 누적 관객 수는 7만3885명에 불과하다.

지난해 글로벌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75개 타이틀을 거머쥐고선 한국에 상륙했지만 티켓 판매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흥행 동력도 빠르게 상실하는 모양새다. 개봉 첫날 8376명의 관객이 입장한 영화는 일주일만인 13일 관객 수가 3134명으로 62.6% 감소했다. 이날 오후 기준 예매율도 1.5%에 그치며 9위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해 6월 개봉하며 북미 지역에서 장기 흥행을 이어간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계인 셀린 송 감독이 연출한 ‘패스트 라이브즈’는 아련한 첫사랑을 풀어낸 영화다.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나영과 해성이 헤어졌다가 12년 만에 SNS를 통해 재회하고, 다시 12년 후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는 이야기다. 24년이란 시간의 어긋남과 태평양이란 공간의 장벽으로 결국 이어지지 못하지만, 둘 사이에 연결된 인연의 실은 끊어지지 않는다.

▶▶▶(관련 기사) 인연과 전생, 한국인만 아는 사랑의 형태...놀란 감독도 놀란 '패스트 라이브즈'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비슷한 서사구조를 가진 다른 로맨스물과 달리 ‘패스트 라이브즈’엔 옷깃만 스쳐도 생긴다는 ‘인연’과 ‘전생’(前生)이라는, 다분히 한국적인 정서와 이민자를 다룬 ‘디아스포라’ 색채가 함께 녹아있다. 이 점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반대로 국내에선 아쉬운 결과를 이끈 것으로 풀이된다.

인연이나 전생은 한국인에겐 다소 유치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흔한 이야기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시인 피천득의 수필 ‘인연’을 접하게 되는 등 낯선 개념이 아니다. 영화를 본 관객 일부에서 “한국인이 보기엔 새롭거나 특별하진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 이유다. 고국을 떠난 이민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디아스포라 이야기도 시대적 화두로 자리매김한 미국과 달리 한국에선 아직 크게 공감되는 소재가 아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이민자라는 신분이 어떻게 보면 현생을 살면서 전생을 경험하는 사람일 수 있다. 떠나오기 전의 삶이 마치 전생처럼 느껴지는 것”이라며 “그런 디아스포라 틀 안에서 전생의 인연을 풀어내니 해외에선 흥미롭게 다가오겠지만, 국내에선 남녀 간 사랑 이야기 정도가 된 것”이라고 했다.

영화 특유의 감수성도 ‘서울의 봄’이나 ‘파묘’ 등 강렬한 소재로 만들어진 작품 맛을 본 관객들에겐 싱겁게 다가올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정 평론가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 앞에서 나영과 해성이 대화를 나눈다거나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울림이 있는 연출이지만 대중에겐 와닿지 않을 수 있다”면서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는 입장에선 너무 담백할 수 있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i912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