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범선. 하멜도 이 같은 모양의 배로 항해하다 제주에서 난파당했다.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범선. 하멜도 이 같은 모양의 배로 항해하다 제주에서 난파당했다.
“전원 사망했습니다.” 370년 전인 1654년 10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무역선 스페르베르호와 화물을 결손 처리하면서 승무원 64명이 모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바타비아(자카르타)에서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가던 배가 악천후 속에서 실종된 지 1년여 만이었다.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에 있는 네덜란드 상관(商館) 관리들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666년 9월 14일, 죽었다던 승무원들이 나가사키에 모습을 드러냈다. 회계와 기록을 담당한 서기 헨드릭 하멜 등 8명이었다. 이들은 태풍으로 제주도 앞바다에서 난파당한 뒤 조선에 13년간 억류돼 있다가 작은 배를 구해 극적으로 탈출했다. 일본 고토(五島)열도에서 뱃사람들에게 발견된 일행은 곧 나가사키 부교(奉行·행정책임자)의 집중 심문을 받았다.

일본 외교문서 받고서야 '깜짝'

하멜 일행의 난파 상황을 묘사한 목판화.
하멜 일행의 난파 상황을 묘사한 목판화.
54가지 질문은 매우 날카롭고 치밀했다. 이름과 국적 등 기본 사항에 이어 대포 수와 화물, 억류 경위, 조선의 정세와 군사 장비, 경제 상황, 국제 관계, 문물, 풍습까지 세세하게 캐물었다. 예를 들면 “난파된 곳은 어디이며 사람은 몇 명이고 대포는 몇 문이었나”라는 복합질문을 통해 “제주도 근처, 승무원 64명(생존자 16명 중 8명은 아직도 조선 억류), 대포는 30문” 등의 정보를 입체적으로 파악했다.

곧이어 조선에 관한 문답이 집중적으로 오갔다. “무기와 군사 장비는?” “화승총과 칼, 활, 화살, 그밖에 조그만 창도 있다.” “성이나 성채(요새)는?” “고장마다 작은 성채들이 있다. 산 높은 곳에도 성채가 있는데 전쟁이 나면 그리로 피란 간다. 그곳엔 3년분의 식량이 비축돼 있다.” “바다의 군함은?” “고장마다 한 척씩 있다. 군인과 노 젓는 사람 합해 200~300명씩 타고 작은 대포도 몇 문씩 있다.”

나가사키의 교역 장소인 인공섬 데지마.
나가사키의 교역 장소인 인공섬 데지마.
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물었다. “조선에 무역차 온 외국인이 있나? 조선인이 다른 곳에 가나?” “일본인 외에는 없다. 일본은 상관(商館·동래 왜관)을 두고 있다. 조선인은 중국 북부 지방, 베이징과 무역하고 있다.” “중국과는 어떤 무역이 이뤄지나?” “조선인은 인삼, 은 등을 갖고 가고, 비단 따위나 우리가 일본으로 가져오는 상품들을 가져온다.” “은광(銀鑛)이나 다른 광산이 많이 있나?” “몇 년 전 은광을 몇 개 개발했는데 왕이 4분의 1을 가져간다. 다른 광산은 들은 바 없다.”

이런 심문을 통해 모든 정보를 파악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한나절에 불과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매뉴얼을 준비해 둔 것 같았다. “기독교인을 태웠느냐, 조선에서 기독교인을 봤느냐”는 질문도 있었다. 당시 일본은 기독교 유입을 강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나가사키 부교는 이 문제까지 철저히 조사한 다음 이들을 네덜란드 상관에 인계하고, 11일 뒤 다시 불러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정보를 재확인했다.

네덜란드로부터 나머지 선원들의 송환 요청을 의뢰받은 일본은 조선에 “화란(네덜란드)인을 왜 억류하고 재물을 강탈했는가”라며 따졌다. 놀랍게도 조선은 그때까지 하멜 일행의 탈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들이 네덜란드인이라는 것도 몰랐고, 남만인(南蠻人, 동남아시아 야만인)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남(南)씨 성을 붙여 ‘남하면(하멜)’ 등으로 불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나라 문을 걸어 잠근 탓이었다.

하멜이 기록한 ‘조선왕국기’에 ‘조선인은 전 세계에 12개 왕국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남만국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일본인이 포르투갈을 부를 때 사용하던 이름입니다. 그들은 네덜란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 많은 나라가 있다며 이름을 말해 줘도 비웃으며 필시 고을이나 마을 이름일 거라고 반박합니다. 해안에 대해 그들의 지식은 샴(태국) 이상 멀리 나아가지 못합니다. 더 먼 외국과 교류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멜 표류기'도 270년 뒤에 번역

일본은 16세기부터 유럽과 교류하면서 서양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유럽의 군사 접근에는 강한 보호막을 치면서 무역과 상업에서는 실리를 챙겼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나가사키를 열어 주고 난학(蘭學·네덜란드학)을 배워 근대화의 동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은 국제 정세를 너무 몰랐다.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청나라의 앞선 과학기술을 오히려 오랑캐 것이라고 외면했다. 하멜 일행의 서양식 선박 제조와 장거리 항해, 대포와 소총 관련 기술을 활용하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하멜의 관찰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네덜란드와 중국에서 수입한 후추, 약재, 소뿔, 사슴가죽 등을 조선에 비싸게 팔고 인삼 등을 싸게 사 갔다. 일본이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담배를 조선에 처음 팔 때는 담배 무게만큼 은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내용을 담아 하멜이 동인도회사에 밀린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제출한 산업재해 보고서가 <하멜 표류기>다. 은둔 왕국 조선을 다룬 이 책은 1668년부터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우리나라에는 약 270년 뒤인 1934년에야 소개됐다. 이렇게 뒤처진 나라가 식민 지배와 전란을 이기고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딛고 다시 일어서고 있다. 1980년대 세계 시장의 절반을 차지했던 반도체산업 부활에 전력을 쏟고 있다. 이달 4일엔 닛케이지수가 처음 40,000을 돌파했다. 첨단기술 경쟁에 뒤처지면 순식간에 쇠락하고 만다. 지난해 우리 경제 성장률은 외환위기 때였던 1998년 이후 25년 만에 일본에 뒤졌다. 세계정세 변화를 민첩하게 따라잡으면서 국가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