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카우어가 쓴 영화학 고전 '영화의 이론'
"영화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여주는 것"
히치콕의 영화를 보면서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리얼리즘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는 지나치게 명확할 정도로 모든 것을, 순전히 시각적 수단에 의지해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영화가 단순하고, 영화적 지평이 거의 어린애 같은 아이디어 수준에 머문다는 비판이 당대에 있었던 이유였다.

그는 인물의 생각을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영상으로 담아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대사는 최대한 절제했다.

히치콕은 대사 속에 진실과 사실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가령 저녁 식사나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장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진짜 중요한 건 말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사람들의 진심을 알려면 그들의 눈을 살펴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히치콕은 인물들의 눈을 살피는 데 천재였다.

'400번의 구타'를 만든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는 그런 점에서 히치콕을 '리얼리스트'라고 말한다.

"의혹, 질투, 욕망, 부러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즉 설명적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영화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거의 독보적"이라고 평가했다.

"영화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여주는 것"
트뤼포의 말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감정, 편집, 이야기, 꿈 등 영화를 정의하는 말은 무수히 많다.

크게 보면 뤼미에르 형제에 뿌리를 둔 리얼리즘적 경향, 조르주 멜리에스에게서 시발점을 찾는 조형적 경향으로 영화 스타일을 구분할 수 있다.

리얼리즘 경향은 카메라 앞에 놓인 물리적 현실을, 조형적 경향은 역사와 환상의 세계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영화이론가이기도 한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1889~1966)는 최근 번역 출간된 그의 대표작 '영화의 이론'에서 사진과 영화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영화가 본질적으로 사진의 연장이며 따라서 사진이라는 매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위의 가시적 세계에 대해 각별히 친화적이라는 가정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300여 편에 달하는 영화들을 사례로 제시하며 영화의 세부 요소들을 고찰하면서 자신의 테제를 구체적으로 입증한다.

그에게 있어 영화의 본질은 대사, 편집 등과는 무관하다.

영화는 "순간적인 물질적 삶, 가장 덧없는 삶을 찍고자 하는 열망"에 지배된다고 봤다.

"거리의 군중, 뜻하지 않은 동작, 흘러가 버리는 인상들이 영화의 진정한 실질"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영화란 "바람에 흔들려 잔물결 치는 나뭇잎"을 보여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영화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여주는 것"
영화에 대한 크라카우어의 이런 지적 탐험을 두고 1950~60년대 영화에 대한 철 지난 비평이라고 평가절하하기 쉽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영화의 화려한 편집술과 촬영 기교, 넋을 빼놓는 대사를 떠올린다면 그런 비판은 타당하다.

하지만 "바람에 흔들려 잔물결 치는 나뭇잎"은 어떤 영화적 진실을 머금고 있다.

오즈 야스지로가 직조한 도쿄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보고(도쿄이야기) 마음이 움직이거나, 햇살에 반짝거리는 나뭇잎에 처연해지거나(너를 보내는 숲·가와세 나오미 감독), 갑옷을 입은 채 결국 고개를 떨구고야 마는 란슬롯(호수의 란슬롯·로베르 브레송 감독) 앞에서 숙연해진다면, 크라카우어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문학과지성사. 김태환·이경진 옮김. 662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