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뿌리는 현금 복지로 저출산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고용을 통해 성장과 선순환하는 서비스 복지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합니다.”

윤석열 정부 초대 사회수석을 지낸 안상훈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사진)는 지난 27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안 교수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회복지문화분과 위원을 지내는 등 현 정부 사회정책을 설계한 인물이다. 정부 출범 이후 지난해 12월까지 1년6개월간 사회수석으로 근무하면서 유아교육과 보육체계를 일원화하는 ‘유보통합’ 등 저출산 정책을 주도해왔다.
안상훈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전 대통령실 사회수석)가 27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솔 기자
안상훈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전 대통령실 사회수석)가 27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솔 기자
그는 저출산의 핵심 원인으로 문화지체를 꼽았다. 문화지체는 물질 문화의 변화 속도를 비물질 문화가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안 교수는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을 앞지르고 경제활동참가율도 꾸준히 오르고 있지만 여전히 노동시장에는 가부장적 문화가 남아 있다”며 “북유럽이나 프랑스 등 출산율 반등에 성공한 국가들을 보더라도 가부장적 문화를 바꾸는 데 20~30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현금복지 같은 단기적 처방으로는 출산율을 끌어올릴 수 없다는 지적이다. 가부장적 문화를 바꾸기 위해 육아휴직 등 일·가정 양립 제도를 정착시키는 쪽으로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는 분석도 내놨다.

다음은 안 교수와의 일문일답.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저출산(저출생)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인구 문제는 보통 큰 문제가 아니다. 주거, 일자리, 교육, 보육, 지역 불균형 등 다양한 사회구조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다. 기본적으로는 문화 요인이 가장 크다. 노동시장에 여전히 작동하는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여성들에게 출산·육아 관련 부담이 가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당연시됐던 생각이지만,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을 넘어서고 경제활동참가율이 올라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경제·사회적 구조가 변화했음에도 가부장 문화가 계속 작동하는 ‘문화지체’ 속에서 젊은 여성들이 출산을 피하는 것은 당연하고 합리적 선택이다.

▷저출산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가요.

저출산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출산율이 반등한 유럽 국가들도 똑같은 경로를 거쳤다. 패트리아키(patriarchy)라는 가부장주의는 서양에도 있었다. 많은 나라에서 수천 년 동안 남성 우위 문화가 작동했지만, 여성들이 고등교육 수혜를 보면서 가부장제를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서구는 수십 년에 걸쳐 문화를 바꾸는 데 성공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에 기반한 가부장주의가 아직까지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문화적 요인 외에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서구는 경제성장이 우리나라만큼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서구는 천천히 성장하면서 복지국가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해왔다. 우리나라는 1961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00달러가 안 됐다. 지금은 3만달러가 넘는다. 60년 동안 300배 오른 것이다.

성장이 워낙 가파르다 보니 복지가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성장이 꺾인 순간부터 복지의 필요성이 커졌다. 20~30년 전부터 복지국가 전략을 택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지에 관한 관념이 없다 보니 현금복지에만 치중하면서 시간을 허비했다.

▷현금복지가 문제라면 해답은 무엇입니까.

돌봄과 관련한 서비스 복지에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 주머니에 현금이 들어오면 노동시간을 먼저 줄인다. 반면 서비스 복지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성장과 선순환한다. 교육·보육·간병 관련 일자리를 창출하고 여성들을 돌봄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짜야 한다.

돌봄을 국가책임제로 제대로 해야 한다. 정부가 추진 중인 유보통합, 늘봄학교 등이 대표적 정책이다. 정부가 재정을 투입하지만 서비스 공급을 민간이 더 잘한다면 민간에 맡길 수도 있다.

육아휴직 등 일·가정 양립 정책을 통해 여성들의 경력단절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최우선 과제다. 남녀 간 차이가 없도록 하려면 아빠도 육아휴직을 쓰게 해야 한다. 대기업이나 공무원과 달리 중소기업은 제도가 있어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 대체인력 비용을 정부가 과감하게 대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저출산 해소하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굉장히 오래 걸리는 문제다. 한 세대, 대략 30년 사이클이 지나야 정상화될 수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손을 놓아선 안 된다. 장기적 관점에서 일관성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현재 청년 세대가 낳은 아이들이 성인이 됐을 때쯤 ‘아이를 키우는 것이 키우지 않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인구정책 컨트롤타워인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저고위에서 좋은 논의가 많이 나오지만, 예산 조정이나 정책을 실질적으로 총괄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보니 한계가 있다. 저고위에서 조정한 대로 개별 부처들이 실행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부처 이기주의가 작동해서 각 부처에서 실행을 잘 안 한다.

인구 정책을 총괄하는 전담 부처인 사회보장부 혹은 인구사회보장부를 만들고 사회부총리급으로 격상해야 한다. 교육부는 교육에 특화돼 있어 저출산·양성평등 이슈를 다룰 수 없다. 저고위는 아이디어 뱅크와 감시자 역할을 하면 된다. 실질적인 정책 진두지휘는 사회보장부가 중심이 되는 방안이다.

▷일각에선 저출산을 해결하기보다는 축소사회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성급하다. 시나리오 중 하나로 대비해야 하지만 정부의 메인 정책이 될 수는 없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측면이 있는데 너무 디스토피아적 처방전이다. 우리나라처럼 단일민족주의 관념이 강한 나라에서 이민 역시 현실적인 선택지는 아니다.

서형교 기자 seogy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