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판사가 쓴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사회 평균인·진술 신빙성…생경한 판결문 속 판사의 언어
2018년 대법원에서 개를 감전시켜 도살하는 '전살법'이 동물보호법이 금지하는 '잔인한 방법'인지에 대한 판단이 나왔다.

판결문에는 "잔인한 방법인지 여부는…사회 평균인의 입장에서…판단하여야 한다"라며 '사회 평균인'이란 모호한 주체의 관점이 등장했다.

이처럼 생경한 문구가 담긴 판결문을 한 번에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인 손호영 판사가 쓴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은 이목을 끈 사건의 '판결'을 주인공으로 한다.

판결문의 실제 문장을 실마리 삼아 판사의 의도와 논증을 분석하고, 판결의 속뜻과 사회적인 영향을 쉽게 풀어냈다.

저자는 "판결도 하나의 이야기이고 콘텐츠"라며 판결의 객원 해설가를 자처했다.

저자는 법에서 말하는 사회 평균인은 실재하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마땅히 따라야 할 속성을 지닌 사람, 즉 규범적 평균인"을 뜻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해당 판결은 동물 생명 존중으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해 사회 평균인의 인식도 이 같을 것이란 의미를 내포했다고 풀이한다.

다시 말해 "세상이 변했다"는 얘기다.

사회 평균인·진술 신빙성…생경한 판결문 속 판사의 언어
일명 '땅콩 회항' 사건에선 항공사 부사장의 항공보안법 위반 여부를 두고 '항로'의 개념이 판단 근거가 됐다고 소개한다.

세간의 관심은 '갑질 논란'이 형사처벌 대상이 될지에 쏠렸지만, 대법원판결은 갑질보다 지상에서의 항공기 이동이 항로 변경에 해당하는지에 집중됐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는 2020년 친부 성범죄 사건의 대법원판결에 담긴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란 문장의 의미도 짚어본다.

물적 증거나 목격자가 없는 사건이었지만, 피해자인 아이의 "경험과 관찰이 가진 무게를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판결이라고 이야기한다.

판결문에는 이례적으로 감정이 실리거나, 시인 뺨치는 문체와 비유가 담기기도 한다.

저자는 19세 베트남 출신 부인 살해 사건에 대한 2008년 대전고법 판결문 속 "부끄럽다"는 문구에 주목했다.

해당 판사는 피해자가 살해되기 전날 쓴 편지를 이례적으로 인용하며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고 했다.

저자는 이에 대해 판사가 1심의 형이 부당하지 않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설득 방법으로 '공적 감정'을 택했다고 그 의도를 가늠해본다.

사회 평균인·진술 신빙성…생경한 판결문 속 판사의 언어
다양한 판례 속 언어를 쉽게 풀어준 저자는 판결은 '갈등 해결'을 위해 존재하고, 그 핵심은 '설득'이라고 말한다.

판결이 존중과 신뢰를 얻으려면 논증을 넘어 판사의 인격, 재판을 대하는 태도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2020년 한국리서치 설문에 따르면 언론에서 접한 판결의 신뢰도에 대한 물음에 응답자 66%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한 반면, 신뢰한다는 응답은 29%에 그쳤다.

또한 재판받는다면 인공지능(AI) 판사와 인간 판사 중 누구를 택할 것이냐는 물음에는 AI 판사라는 응답(48%)이 인간 판사(39%)보다 높았다.

저자는 사건을 파악하는 성실함, 기록 이면의 것을 바라보는 면밀함, 당사자와 소통하는 개방성 등 판사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살펴보며 "사람 판사와 AI 판사의 가장 큰 차별점일 수 있겠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240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