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작비 급상승·저가 수입산 대량 유입·환경 규제 등 '다중고'
EU, 녹색규정 연기·우크라산 농산물 관세…부랴부랴 농민 달래기
"농사지어도 빈곤에 빠져" "생존 투쟁"…사태 진정 미지수
유럽 농민시위 '들불'…뿔난 농부들, 왜 거리로 나섰나
지난달 18일(현지시간) 프랑스 농부들이 트랙터를 몰고 거리를 봉쇄하며 본격화된 농민 시위가 유럽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31일(현지시간) BBC와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농민 시위가 날이 갈수록 격화하는 가운데 브뤼셀, 독일 등 서유럽부터 루마니아와 폴란드 등 동유럽, 남부의 이탈리아 농부들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등 유럽 농민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작비 급상승에 신음해온 유럽 농민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값싼 우크라이나 농산물까지 시장에 유입되면서 생존 한계에 직면했다고 호소해 왔다.

여기에 유럽연합(EU)의 각종 환경규제와 관료주의는 성난 농심에 기름을 부으며 농민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프랑스 등 각국 정부와 EU는 경작지 휴경의무를 한시적으로 유예하는 등 녹색 규정을 연기하고,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수입 제한 추진 등의 대책을 부랴부랴 내놓으면서 농심 달래기에 나섰다.

하지만 농민들은 당국이 제시한 조치는 농민들의 현실적 어려움을 타개하기에 크게 미흡한 것이라면서 현재로서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중단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해 이번 사태가 쉽사리 진정될지는 미지수이다.

유럽 농민시위 '들불'…뿔난 농부들, 왜 거리로 나섰나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유럽 곳곳 뿔난 농민 물결
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31일 이번 시위의 진원인 프랑스에서 농민 시위가 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루마니아와 폴란드 등 동유럽과 남유럽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곳곳의 거리가 뿔난 농민들로 점령됐다.

파리에서는 트랙터 시위대 일부가 유럽 최대 규모의 농산물 도매시장으로 꼽히는 '렁지스 시장'으로 접근하자 정부가 이들을 차단하기 위해 장갑차를 추가 투입하는 등 긴장이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교통방해 혐의와 대형 유통업체 창고 침입 시도 혐의로 시위 농민 약 100명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벨기에에서는 지난 30일 유럽의 주요 교역 관문인 제브뤼헤 항구에서 농민들이 진입로 5곳을 막고 시위를 벌인 데 이어 이날은 시위대가 주요 고속도로를 봉쇄하는 한편 브뤼셀 EU 본부 인근까지 트랙터를 몰고 진출했다.

이들은 EU 정상회의가 열리는 1일 EU 집행부와 각국 정상들을 겨냥해 EU의 '녹색 규정' 등에 항의하는 목소리를 낼 계획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북부 피에몬테 알레산드리아와 남부 시칠리아 섬의 칼리아리항 등지에서 농민 수백명이 트랙터를 몰고 나와 이탈리아 정부와 EU의 농업정책을 성토했다.

헝가리와 루마니아,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에서도 값싼 우크라이나 농산물과의 불공정 경쟁, 농업 차량용 경유가 인상에 항의하는 농민 시위가 지난달 말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다.

유례없는 겨울 가뭄으로 큰 타격을 입고 있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농민들도 곧 시위에 합세할 예정이라고 유럽 최대의 농업협동조합·생산자 단체인 코파 코게카(COPA-COGECA)는 전했다.

이밖에 네덜란드와 독일에서도 농업용 경유에 대한 정부의 점진적인 세금 인상 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최근 펼쳐졌다.

유럽 농민시위 '들불'…뿔난 농부들, 왜 거리로 나섰나
◇ 유럽 농민, EU환경규제·저가 농산물 수입 등에 '다중고'
유럽 농민들이 일손을 놓고 분노를 표출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에너지 가격 등 경작 비용이 대폭 증가해 경제적 부담은 커졌는데, 경유 보조금 등 당국의 지원은 줄어들며 농사를 지어도 수입이 쪼그라들고 있는 게 크다.

프랑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농가 소득은 지난 30년 동안 40% 줄었고, 농민 5명 중 1명은 빈곤선 아래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이 유럽에 물밀듯 들어오면서 유럽산 농산물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 것도 농민들의 고충을 가중했다.

EU는 우크라이나의 흑해 항로가 전쟁으로 사실상 봉쇄되자 우크라이나 농산물에 대해 수입할당 제한을 유예하고, 관세를 철폐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산 농산물과 가금류 수입이 급증하며 각국의 시장가가 폭락하는 결과가 초래됐다.

이런 상황에서 보조금 지급의 조건으로 더 높은 환경 기준을 농민들에게 요구하는 EU의 공동농업정책(CAP)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도 임계점에 다다랐다고 분석되고 있다.

EU는 생물 다양성 촉진과 환경 보호 등을 위해 EU 보조금을 신청할 때 농경지 일부를 휴경지로 남기도록 의무화하고, 특정 살충제의 사용을 줄이거나 금지하는 등의 규제를 펴고 있다.

농민들은 이런 규제 때문에 농산물 생산에 비용이 추가로 들어간다며, 이런 사정이 농산물 가격에 반영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유럽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프랑스 농부 브누아 라퀘(58)씨는 "우리를 그냥 놔둬라. 그저 평화롭게 일하고 싶다"고 외치며, EU의 규제 과잉과 저가 외국산 농산물과의 가격 경쟁, 불공정한 환경 규제 등에 불만을 드러냈다고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전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산 수입 농산물을 가리키며 "그들은 EU 회원국이 아닌데, 면세로 수출하면서 시장을 우리에게 빼앗고 있다.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환경)규제 아래 생산하지도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 농민시위 '들불'…뿔난 농부들, 왜 거리로 나섰나
◇ EU, 달래기 나섰지만…농민들은 "아직 부족"
유럽 각국에서 농민 시위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EU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마르가리티스 스히나스 EU 부집행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우크라이나·몰도바산 수입품 급증에 대비한 조치를 발표했다.

EU는 품목 상관없이 특정 회원국의 요청이 있으면 시장 가격 왜곡 여부를 조사해 시정 조처를 제안하고 닭고기, 설탕 등 한시적 면세 조처를 받는 품목의 수입량이 지난 2년 치 평균을 초과하면 자동으로 관세를 부과할 방침이다.

EU는 농민들의 또 다른 불만인 '휴경지 4%' 의무화도 올 한해 한시적으로 면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들 조치는 EU 전체 27개국의 최종 합의가 있어야 확정된다.

프랑스 정부도 거세지는 농민시위를 가라앉히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프랑스 일각에서는 성난 농민들이 도로를 점거한 채 건초더미와 폐타이어에 불을 지르고 지방 행정기관 건물에 거름을 뿌리는 등 시위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과열되는 양상이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은 31일 현지 라디오에 "EU와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간 자유무역협정(FTA)은 우리 농민에게 좋지 않다"며 "이 협정에 서명할 수도 없고, 서명해서도 안 된다"고 EU를 압박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1일 열리는 EU 특별정상회의에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을 만나 메르코수르와의 FTA 반대 등 농민들 의사를 강하게 전달한다는 입장이다.

독일 정부의 경우 농업용 디젤의 세금 면제를 점진적으로 종료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BBC는 전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로 "잊히고 배반당했다고 느끼거나 가족들을 부양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농민들의 불만이 잦아들지"는 불투명하다고 BBC는 지적했다.

독일농민협회의 요아힘 루크비트 회장은 "지금까지 발표된 모든 것들은 농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는커녕 더 부추기고 있다"며 농민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행동을 멈출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분열과 극단화 현상이 커지고 있다"고 인정하면서 농민 단체와 EU 정책 입안자 사이의 '전략적 대화'에 착수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BBC는 전했다.

한편, 오는 6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주요 국가에서 농민들의 분노에 편승해 극우 정치세력이 약진할 것이라는 전망도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