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지 보험’을 둘러싼 손해보험업계의 ‘치킨 게임’이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단기 실적에 매몰된 일부 보험사가 보험료를 확 낮춰 박리다매식 영업에 나서자 업계 전반에 출혈 경쟁이 벌어지는 모습이다. 업계 안팎에선 단기 실적 개선으로 성과급과 배당만 챙기고 재무 리스크를 10년 뒤로 미루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결국 금융소비자에게 피해가 전가될 수밖에 없어 금융당국이 발 빠르게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해지율 높여 수익성 ‘뻥튀기’

'無해지 반값 보험' 출혈경쟁 뛰어든 손보사들
31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인(人)보험 시장에서 무해지 보험 판매 비중은 2022년 1월 19.5%에서 지난해 12월 49.8%로 치솟았다. 무해지 보험은 납입 기간에 해약하면 환급금이 한 푼도 없는 상품이다. 대신 보험료가 30% 이상 싸다. 국내에는 2015년 7월 등장했다. 처음에는 순수 보장성 20년 이하 전기납 상품에만 허용됐지만 2019년 규제 완화로 시장 규모가 급격히 커졌다. 당장 보험료를 아끼려는 소비자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문제는 보험사들이 무해지 보험 판매 과정에서 일종의 ‘분식회계’를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회사마다 보험료 책정의 주요 근거가 되는 해지율을 임의로 추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A손보사는 어린이보험(30년 납)의 가입 후 1년 내 예상 해지율을 11.2%로 잡았지만 B손보사는 7.0%로 가정했다. 해지율 예상치가 높다는 것은 보험사가 장래에 지급할 보험금을 적게 본다는 의미다.

예상 해지율을 높이면 보험료를 낮출 수 있다. 보험료가 저렴해지면 판매량이 늘어 단기 실적을 개선할 수 있다. 또 미래에 지급해야 할 보험금 규모를 적게 추정해 이익을 크게 잡는 효과가 있다.

당장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상은 딴판이다. 리스크가 미래로 떠넘겨지는 구조여서다. 보험 가입자가 보험사 예상 해지율보다 계약을 오래 유지하면 보험사들은 책임준비금을 추가로 쌓아야 한다. 장기간에 걸쳐 보험금 지급 부담이 커지면서 건전성도 악화한다.

보험사들이 향후 보험료 인상, 해약 유도, 보험 가입 거절 등에 나설 가능성도 높다. 결국 금융소비자가 나중에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미국에서는 무해지 보험을 판매한 보험사들이 도중에 해지율 예상치를 바꾸면서 보험료가 급격히 인상된 바 있다. 캐나다에서는 무리한 해지율 추정 때문에 몇몇 보험사가 파산하기도 했다.

올초 생명보험업계에서 벌어진 단기납 종신보험 ‘치킨 게임’과 비슷한 양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작년 말부터 생보사들은 이 상품을 공격적으로 팔면서 단기 실적은 개선됐지만 해약 환급금을 돌려줘야 하는 10년 뒤로 모든 리스크가 미뤄졌다.

○연내 대책 발표한다더니

금융당국은 무해지 보험을 둘러싼 논란에 여러 차례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모두 미봉책에 그쳤다는 비판이 나왔다. 문제의 근원인 해지율 조작을 놔두고 ‘땜질식’ 처방만 반복하면서 위기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금융감독원은 2022년 말 해지율 모범규준을 제정했다. 하지만 모범규준에는 해지율 경험통계가 부족한 경우 활용할 수 있는 참고자료를 적시하지 않았다.

금감원은 지난해 7월 “무해지 보험의 보험료 산출 시 자의적으로 높은 해지율을 적용하고 있다”며 “연내 감독규정 개정 등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금감원 주관 회의가 수차례 열렸지만 해를 넘기도록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금감원 관계자는 “아직 제도 개선 방안이 확정되지 않았고 검토 중인 단계”라고 말했다.

한 보험사 임원은 “무해지 보험 과당경쟁이 지속되면 보험산업이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황폐해질 수 있다”며 “해지율 가정을 엄격히 통제하는 게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강조했다.

서형교 기자 seogy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