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 '정미소: 낟알에서 흰쌀까지' 조사 보고서 펴내
배고프던 그 시절, 쌀이 포대째…이제는 추억이 된 정미소
요즘에는 마트나 슈퍼마켓에서 흰쌀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동네 정미소(精米所)를 거쳐야 했다.

수확의 계절이 다가오면 정미소에는 벼를 찧어 쌀로 바꾸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에도 곡물을 도정하는 기계 주변에는 흰쌀이 수두룩하게 쌓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국내 정미소가 약 2만5천 곳에 달했다고 한다.

한때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정미소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국립민속박물관이 최근 펴낸 '정미소 : 낟알에서 흰쌀까지' 보고서는 근대 이후 등장한 정미소의 정착과 발전, 도시화와 산업화 이후 쇠락한 과정 등을 정리한 자료다.

배고프던 그 시절, 쌀이 포대째…이제는 추억이 된 정미소
보고서는 정미소가 100여 년 동안 '흥망성쇠'를 겪은 공간이라고 짚는다.

학계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정미소는 1889년 설립한 인천정미소로, 오전 4시부터 오후 8시까지 16시간을 가동하면 하루 52석의 쌀을 찧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각종 기계를 도입한 근대식 정미소는 1892년 문을 연 것으로 전한다.

보고서는 "당시로서는 최신 제품이자 최초의 기계식 정미기를 도입했는데, 12시간을 가동할 경우 현미는 16석을, 백미는 8석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주요 미곡항을 중심으로 설치된 정미소는 점차 농촌 지역까지 확대됐다.

마을이나 조합 단위로 돈을 모아 공동 정미소를 설립하는 경우도 있었고, 제대로 된 농촌사회라면 정미소는 갖춰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보고서는 "1977년 무렵에는 사실상 전국 대부분 지역에 정미소가 보급됐다.

당시 곳곳에 설립되기 시작한 농협 소속 도정 공장을 더하면 약 2만5천곳에 달한다"고 강조했다.

배고프던 그 시절, 쌀이 포대째…이제는 추억이 된 정미소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정미소는 서서히 자리를 잃었다.

1984년 농림부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정미소는 총 1만9천44곳으로 집계됐으나 1988년에는 1만8천여 곳으로 줄었고, 1991년에는 1만6천여 곳으로 그 수가 감소했다.

농업 다각화로 인한 쌀 생산량 감소, 식생활 변화에 따른 쌀 소비량 감소, 건조부터 포장까지 도정 전 과정의 자동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박물관 관계자는 "정미소는 전통적 방식으로 방아를 찧던 때와 자동화 양곡 가공공장이 주류가 된 때 사이에 존재하던 것으로, 근현대 생활상을 반영하는 매개체"라고 설명했다.

보고서에는 지금은 보기 어려운 형태의 정미소를 조사한 내용과 영업이 종료된 정미소를 활용한 최신 사례 등도 담겼다.

보고서는 박물관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배고프던 그 시절, 쌀이 포대째…이제는 추억이 된 정미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