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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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비, 생활비를 따져도 미국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더 저렴했어요. 최신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많고요.”

최근 학부를 졸업한 A씨는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 진학했다. 졸업 후 기업 취업과 교수직을 모두 고려해봐도 미국 대학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대학원 장학금과 지원금 등을 감안하면 한국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보다 오히려 비용도 덜 들었다. A씨는 “망설일 필요가 없는 결정이었다”고 했다.

우수 인재들이 더 이상 국내 대학원을 찾지 않는다. 진로가 불투명한 문과생은 시간과 돈을 들여 대학원에 진학하기보다 기업행을 택하고 있다. 이과생은 다양한 인센티브를 내건 미국 대학원으로 향하고 있다. 이로 인한 국내 대학원 공동화 현상은 서울대를 비롯한 주요 대학도 피해가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학생 못 구하는 위기의 대학원

서울대 대학원마저 텅텅…"교수 자리도 없고, 기업선 물경력 취급"
24일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서울대에서 받은 ‘학과별 신입생·재학생 충원율’에 따르면 2023학년도 노어노문학과, 서어서문학과는 석사과정 5명씩을 모집했지만 등록한 인원이 한 명도 없었다. 서양사학과 박사과정과 언어학과 석·박사통합과정도 각각 2명을 모집했지만 지원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연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2023학년도 석사과정 신입생을 뽑은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12개 학과 중 6개 학과(50%)가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박사과정은 13개 중 8개(61.5%), 석·박사통합과정은 12개 중 8개(66.7%)가 미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공과대학도 석사과정 16개 학과 중 10개(62.5%), 박사과정은 16개 중 8개(50%), 석·박사통합과정은 14개 중 13개(92.9%)가 미달이었다.

학령인구 감소가 대학원 위기의 1차 요인으로 꼽히지만, 국내 대학원의 자체 경쟁력 약화가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게 교육 현장의 지적이다.

학부만 마치고 한국을 떠나는 이공계 인재가 늘고 있는 게 방증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3~2022년) 외국 대학으로 떠난 이공계 유학생(석사 이상)은 9만6062명이었다. 유학생이 느는 것은 이들 대학이 연구 인프라가 잘돼 있고, 졸업 후 진로도 다양해서다. 미국 대학들은 재정 여력이 충분해 시설 투자와 인건비를 아끼지 않는다. B씨는 “미국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에서 10여 년간 근무했다”며 “같은 학력과 경력을 갖췄을 경우 미국에서 취업했을 때 받는 월급이 한국의 5배가 넘어 돌아올 유인이 없었다”고 말했다.

○석·박사보다 대기업 선호

한국에서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 학위를 따더라도 진로가 불투명하다. 10년 전만 해도 국내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 대학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순환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졌다. 한 대학 관계자는 “문을 닫는 지방대가 늘어나면 갈 수 있는 교수직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대학원에 가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수로 임용돼도 대우가 예전만 못하다. 10여 년간의 등록금 동결로 연봉은 제자리인데, 강의뿐 아니라 연구 성과가 중시되며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홍유석 서울대 공대 학장은 “서울대에서 교수로 실력을 갖췄다면 해외나 민간 기업 등에서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며 “보수 등을 고려했을 때 서울대 교수라도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대기업 취업에서도 석·박사는 과거만큼 대접받지 못한다. LG그룹은 석사는 2년, 박사는 박사 취득 기간을 경력으로 쳐주지만 이공계 박사에 한해서다. 문과는 혜택이 없다. 롯데그룹은 그룹사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혜택이 아예 없다. 엄미정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학원에 가는 학생은 대부분 상위권 성적의 학생”이라며 “학부를 마치고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석사 과정을 밟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기초학문 지원 축소와 폐지는 이공계 대학원생 감소를 심화시킬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혜선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원은 “대학원생은 대학이나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경우가 여전히 많은데 연구개발(R&D) 예산은 이런 부문 일자리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