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를 견인하는 반도체가 불황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다. 어제 나온 삼성전자의 지난해 실적을 보면 반도체 사업의 반등이 수치로 확인된다.

삼성전자의 작년 영업이익은 15년 만에 가장 저조했지만, 2분기 이후 세 분기 연속 실적이 개선되고 있는 점이 고무적이다. 메모리 출하량 증가와 평균 판매단가(ASP) 상승 등 반도체 시황 회복으로 반도체 부문 적자가 축소된 데 힘입은 것이다. 여기에 인공지능(AI) 반도체의 핵심인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양분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한국 반도체산업이 본격 회복세를 보일 것이라는 기대를 낳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의 봄’을 마냥 여유롭게 바라볼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세계 반도체 대전은 날로 격화하는 양상이다.

과거 반도체산업의 맹주인 미국과 일본이 무서운 속도로 부활하고 있다. 미국 반도체·과학법의 최대 수혜자인 인텔은 차세대 공정 기술력 경쟁의 분수령인 2나노 제조에 필수적인 ASML의 ‘하이 NA EUV’를 작년 말 세계 최초로 공급받았다. 삼성과 TSMC는 2025년에야 이 장비를 납품받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역시 정부 보조금을 앞세워 속도전을 벌이고 있다. TSMC 구마모토 1공장을 예상보다 이른 올 2월 말 준공하고 5나노 공정의 구마모토 2공장 착공에 이어 3나노 공정의 오사카 3공장 건설도 추진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TSMC 공장 건립 비용의 절반가량을 지원한 것은 물론 마이크론 히로시마 공장(2000억엔), 라피더스 홋카이도 공장(3300억엔) 등 국내외 기업 가릴 것 없이 국가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AI와 자율주행 칩 시장을 석권한 엔비디아는 갈수록 기세등등하다. 삼성이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 확장을 꾀하고 있지만 선두 기업과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느낌이다. 자칫 첨단 칩 제조기업들의 하청기업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두렵다. 정부는 올해 반도체 경기 호조를 믿고 경기 회복과 무역수지 방어를 장담하고, 관련 기업들은 실적 반전을 기대하고 있지만 모두 단기 지표보다 첨단산업의 원천 경쟁력을 고심해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