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0분경. 실시간 긴급 속보로 믿기 어려운 소식이 전해졌다. 출근길 서울 성수대교의 상판이 무너져 내리면서 시민 32명이 죽었다는 비보였다. '부실시공'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정부는 1994년을 '부실 공사 추방 원년의 해'로 지정하고, 다시는 건물 붕괴로 인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정부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삼풍백화점이 내려앉았다. 이번엔 무려 502명이 사망했다. 겉으로는 웅장하고 세련된 건물이었지만, 내부는 곪아 터져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백화점 경영진은 건물이 흔들린다는 보고를 받고도 시설을 계속 운영했다. 1990년대 중반 두 차례의 건물 붕괴 사고는 '초고속 성장 신화' 이면의 그림자를 보여줬다.
1995년 6월 29일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전경 /한경DB
1995년 6월 29일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전경 /한경DB
역사 연구자 강부원 저자의 신간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40가지 사건>은 이처럼 현대사에 변곡점을 만들어낸 사건을 선별해 소개한 책이다. 지난 수십 년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소한 사건들부터 누구나 기억할만한 큰 사고들까지 두루 돌아본다. 노동문제, 민주화, 여성 인권 등 각 사건이 내포한 사회적 맥락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추가했다.

저자가 선정한 40가지 사건들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통하는 교훈을 준다. 경기중학교 입시 과정에서 발생한 무즙 파동(1964)이 대표적이다.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항에 '무즙'이라고 답한 학생들이 오답 처리된 게 문제였다. 극성스러운 학부모들은 무즙으로 직접 만든 엿을 들고 항의했다. 그 엿을 들고 시험 관계자들에게 외쳤다. "엿 먹어라"
다리가 붕괴되고, 백화점 무너진 세상 그리고 "엿 먹어라" [책마을]
'엿 먹어라'는 말뿐만 아니라 '치맛바람' 등 속된 말들도 이때 태어났다. 한차례 소동 이후 중학교 입시는 철폐됐지만, 소위 '명문' 학교 진학을 둘러싼 부모들의 입시 전쟁은 60년이 지난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40가지 사건>(강부원 지음, 믹스커피)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40가지 사건>(강부원 지음, 믹스커피)
한편으론 정치적으로 편향된 책의 서술 방식이 아쉬움을 남긴다. 저자는 표면적으로 6·25 전쟁 세대, 산업화 세대, 민주화 세대를 공평한 잣대로 비춘다고 말하지만, 실제 본문 대부분은 특정 세대에 대한 치우침이 드러난다.

산업화 시기 정권들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 완전히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부 대목에선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저자는 연예인 대마초 파동(1975)을 두고 "국민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와 '해방'을 경험케 하지 못하려는 독재 정권의 의도가 반영됐다"고 말한다.

1부의 일부분을 제외한 책의 나머지 장들은 술술 읽힌다. 책은 2부에서 성장 신화의 부실한 민낯을 밝히고, 이어지는 3부와 4부에선 시대가 낳은 각종 범죄와 사건·사고를 소개한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