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을 위한 비석이 여기 있다”… 각자도생한 이들의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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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재현의 탐나는 책
<퀸 베이비>, 이시 우드, 일민미술관 학예팀, 2023.
<퀸 베이비>, 이시 우드, 일민미술관 학예팀, 2023.
김동휘 편집자는 탐나는 책 칼럼에서 밀레니얼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대를 대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주 사적인 나의 이야기를 증언하는 것이다. (…) 나는 무엇인가. 나의 2010년대, 혹은 지금 진행 중인 2020년대는 어떤 의미인가. 물론 이 또한 잘 모르겠다. (…) 그러나 “모른다”고 말하는 것 또한 하나의 증언이다. 불안과 변덕, 충동과 무지 역시 지금 나의 진실이고 우리 세대의 현실이니까.” 나 또한 밀레니얼 세대로서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나는 누구고, 이 세계는 어떤 곳이며, 우리는 어떤 것을 하고 있는가?
시차와 경계 없이 교류하는 요즘에는 한국의 밀레니얼에 대한 실마리를 외국으로부터 찾을 수 있기도 하다. 런던을 기반으로 회화와 음악 작업을 병행하는 예술가 이시 우드의 전시 <아이 라이크 투 워치(I Like To Watch)>가 지난달까지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다. 전시를 관람하면서 자연스레 이시 우드가 블로그에 쓴 일기를 모아 출판한 <퀸 베이비>도 읽게 되었다. 전시에선 캔버스에 그린 회화 외에도 그림을 그린 빈티지 의류가 걸려 있거나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고, 일기가 벽 중간중간 작품을 부연하듯 발췌되어 있었다. <퀸 베이비>는 심지어 본인의 네번째 출간물이어서 실로 그 양과 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데 일견 지극히 시크하고 쿨한 여타의 작업과는 달리, 코로나19의 한복판이었던 2021년 1월에서 2022년 3월까지의 일기를 담은 <퀸 베이비> 속 문장들에는 불안과 우울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1993년생으로 나와 동갑인 이시 우드는 또래 세대 중에서도 특별히 주목받는 미술가라는데 그 평판과 일기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결합이 밀레니얼에겐 본래부터 친숙했고 앞으로도 더욱 그러할 것이었다. 물론 셀린의 <Y 교수와의 대담> 탐나는 책 칼럼에서 보았듯 어느 세대의 예술가라고 자기 신상의 노출이 없었겠냐마는, 또 그것이 쿨-시크함과 불안+우울의 병존이 아닌 적이 있었겠냐마는, 내게 밀레니얼의 그것은 입구도 출구도 알 수 없는 가라앉음과 각자도생의 분투로 다가온다.
<퀸 베이비>의 시작(일기는 날짜의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다)은 이렇다. “나에 대해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거의 모든 순간을 엉망으로 만든다.”(158쪽, 한국어판은 원서의 일부만 옮겨져 있는데 쪽수는 원서 기준으로 보인다) SNS에서 많은 이들이 이 구절에 공감했다는 것이 밀레니얼의 처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이시 우드와 같은 밀레니얼들을 잘 대변해주는 문장들이 곳곳에 있다.
가끔 밀레니얼 세대의 솔직함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곤 한다. 좋든 싫든, 우리가 꺼릴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기성세대가 얼마나 불편해하는지 지켜보는 건 아주 즐거운 일이다. 베이비붐 세대와 X세대는 못마땅한 투로 개인의 감정과 정신적인 혼란을 왜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기는지 묻곤 한다. 그럼 난 60년대부터 7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의 자살률과 약물 과다 복용률이 엄청난 걸 보면 느끼는 게 없냐고 물어본다. (205쪽)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이 한 끼 식사를 위해 하는 짓은 정말 충격적이다(사실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단지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위해 그 짓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메뉴에 새끼 돼지 요리가 나오면 맛있게 먹을 거다. (314쪽)
강아지는 몸을 틀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방법을 모르는 채 뒤로 걷는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강아지는 내 정신이 강아지의 몸으로 육화된 존재라고 생각했다. (…) 강아지의 건강 또는 사회성을 걱정하다가 그 생각으로 가득 차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 강아지에게 필요한 모든 것 때문에 옴짝달싹도 못 하겠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내 희생들을 생각하면 패닉에 빠진다. (324쪽)
회화 작가 중 유일하게 친한 C는 나와 완전히 결이 다른데도 우리 둘의 작업 방식을 계속 비교하고 연결시키니 화가 났던 것 같다. 완성된 작품의 모양이나 의미만 말하는 게 아니다. 미안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데 쏟는 헌신의 정도까지 차이가 있다. (294쪽)
어떤 선행일지라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정직한 동기보다는 불순한 동기가 훨씬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200쪽)
담배를 끼우는 두 손가락 사이가 눈에 띄게 얼룩이 진 걸 보고 깨끗한 손으로 피부를 긁어냈다. (…) 미래가 불안해져서 담배를 더 피웠다. (…) 미국에서는 세금 신고가 너무 번거로워서 사람들이 사설업체 측에 세금 신고 대행을 맡기는데, 그 업체들의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국세청이 계속 복잡한 구조를 고수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나도 누구에게 얼마를 납부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낸다. 별 걱정 없이 그렇게 하고 있다. (176쪽)
치아 사이에 유령 같은 이 음식물이 끼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 내내 귀걸이로, 그 다음엔 뻣뻣한 이쑤시개로, 그 다음엔 신용카드로 쑤셨는데 (…) 입에 피가 가득 고였다. (…) 한동안 소금 풀에 들어가 있었는데 소금이 몸에 난 모든 상처를 따갑게 만들었고, 깨물었던 손가락 상처 안으로도 소금물이 들어갔다. 나는 극단적인 성격이라 온도를 느끼는 통상적인 감각이 둔해지고 그저 그것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찬물과 따듯한 물 사이를 여러 번 오가는 걸 좋아한다. 이때 가장 행복하다. (293쪽)
잘 해보려고 애쓰고 또 애써 봐도 부엌 바닥에 떨어진 당근 한 조각을 보며 내 삶이 무너져 내렸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차 때문도 아니고, 어른이 되어서도 아니고, 그저 떨어진 당근 때문에 말이다. (343쪽)
너무 많은 일정에 시달리면서 워라밸이 무너진 밀레니얼들이 번아웃이 되어 일상에서의 아주 간단한 잡무를 한없이 미루며 큰 손해까지 보곤 한다는 에세이 ‘밀레니얼 세대는 어떻게 번아웃 세대가 되었는가’로 큰 돌풍을 일으킨 앤 헬렌 피터슨의 <요즘 애들—최고 학력을 쌓고 제일 많이 일하지만 가장 적게 버는 세대>를 재작년에 읽었다. 현재는 괴롭고 미래는 전망이 없는 밀레니얼의 처지가 나열되는 동안 구구절절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버릇없을 정도로 솔직하고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데 여념이 없는 밀레니얼의 초상은 우리나라에서도 SNL 등지에서 희화화되기도 했는데, 동시에 밀레니얼은 벼랑까지 내몰린 세대이기도 하지 않을까. 한 친구는 내게, 우리는 아무리 죽어라 일해도 부모님들처럼 집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 했다. 밀레니얼의 근속연수는 점차 짧아지고 있지만 내 주변의 또래에게서 보이는 풍경은 자신과 세계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의욕적인 태도보다는 완전히 소진된 채 스러지는 뒷모습이다.
밀레니얼의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여기서 더 나빠져봤자, 라는 체념의 또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만큼 연약한 스스로를 돌볼 사람 또한 자신밖에 없다는 불신이 방어기제로 비어져나오는 것일지도. 그런 밀레니얼들은 시스템보다는 각자도생의 논리로 자신을 무장하지 않고서는 일상을 버틸 수 없다. 설령 내내 자학하며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더라도 원인을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자가 채찍질의 끝이 보람 없이 쳇바퀴를 무한히 돌리는 ‘불쉿 잡’(데이비드 그레이버)일지라도.
스스로 과연 어떤 사람인지 곰곰 들여다보는 시간은 우리가 더이상 타버리지는 않겠다고 결심하고 분연히 일어나게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잿더미에 불을 지르라’(<요즘 애들>)는 결말에는 다소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정확히 무엇에 반대하여,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 해명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무언가 도모해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잘 알기 위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당연한 귀결에도 조금씩 질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질문들이 빤해 보이는 것은 빤한 해답이 이미 있어서가 아니라 해답 없는 질문이 숱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신형철)이라는 말을 믿기도 한다…
이시 우드의 <퀸 베이비>는 화려한 작업의 이면에 담긴 눈물과 눈치들을, 그리고 그것들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품고 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솔직함이 스스로 서 있는 위태로운 토대를 고발하면서도 살아남아 증명했다는 자부심,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작업을 겸손하게 부정하는 수치심을 수시로 오가며 (의도치 않게) 자신의 아픔까지도 낭만화한다면, 불안과 우울을 자양분 삼아 지속되는 구조는 밀레니얼들을 얼마나 더 집어삼키게 될까.
밀레니얼이 어디에 다다라 있는지 <퀸 베이비>만큼 소상히 파헤치고 토로하는 일지는 드물다. 나는 그의 일기에 깊이 매혹되었고, 매 일기마다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리하여 내가 그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바로 나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다만 나는 ‘행복은 노예의 범주’(지젝)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복을 원하는 밀레니얼으로서 어떻게 내가 소진되지 않고 남을 착취하지도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시차와 경계 없이 교류하는 요즘에는 한국의 밀레니얼에 대한 실마리를 외국으로부터 찾을 수 있기도 하다. 런던을 기반으로 회화와 음악 작업을 병행하는 예술가 이시 우드의 전시 <아이 라이크 투 워치(I Like To Watch)>가 지난달까지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다. 전시를 관람하면서 자연스레 이시 우드가 블로그에 쓴 일기를 모아 출판한 <퀸 베이비>도 읽게 되었다. 전시에선 캔버스에 그린 회화 외에도 그림을 그린 빈티지 의류가 걸려 있거나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고, 일기가 벽 중간중간 작품을 부연하듯 발췌되어 있었다. <퀸 베이비>는 심지어 본인의 네번째 출간물이어서 실로 그 양과 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데 일견 지극히 시크하고 쿨한 여타의 작업과는 달리, 코로나19의 한복판이었던 2021년 1월에서 2022년 3월까지의 일기를 담은 <퀸 베이비> 속 문장들에는 불안과 우울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1993년생으로 나와 동갑인 이시 우드는 또래 세대 중에서도 특별히 주목받는 미술가라는데 그 평판과 일기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결합이 밀레니얼에겐 본래부터 친숙했고 앞으로도 더욱 그러할 것이었다. 물론 셀린의 <Y 교수와의 대담> 탐나는 책 칼럼에서 보았듯 어느 세대의 예술가라고 자기 신상의 노출이 없었겠냐마는, 또 그것이 쿨-시크함과 불안+우울의 병존이 아닌 적이 있었겠냐마는, 내게 밀레니얼의 그것은 입구도 출구도 알 수 없는 가라앉음과 각자도생의 분투로 다가온다.
<퀸 베이비>의 시작(일기는 날짜의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다)은 이렇다. “나에 대해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거의 모든 순간을 엉망으로 만든다.”(158쪽, 한국어판은 원서의 일부만 옮겨져 있는데 쪽수는 원서 기준으로 보인다) SNS에서 많은 이들이 이 구절에 공감했다는 것이 밀레니얼의 처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이시 우드와 같은 밀레니얼들을 잘 대변해주는 문장들이 곳곳에 있다.
가끔 밀레니얼 세대의 솔직함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곤 한다. 좋든 싫든, 우리가 꺼릴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기성세대가 얼마나 불편해하는지 지켜보는 건 아주 즐거운 일이다. 베이비붐 세대와 X세대는 못마땅한 투로 개인의 감정과 정신적인 혼란을 왜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기는지 묻곤 한다. 그럼 난 60년대부터 7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의 자살률과 약물 과다 복용률이 엄청난 걸 보면 느끼는 게 없냐고 물어본다. (205쪽)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이 한 끼 식사를 위해 하는 짓은 정말 충격적이다(사실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단지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위해 그 짓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메뉴에 새끼 돼지 요리가 나오면 맛있게 먹을 거다. (314쪽)
강아지는 몸을 틀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방법을 모르는 채 뒤로 걷는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강아지는 내 정신이 강아지의 몸으로 육화된 존재라고 생각했다. (…) 강아지의 건강 또는 사회성을 걱정하다가 그 생각으로 가득 차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 강아지에게 필요한 모든 것 때문에 옴짝달싹도 못 하겠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내 희생들을 생각하면 패닉에 빠진다. (324쪽)
회화 작가 중 유일하게 친한 C는 나와 완전히 결이 다른데도 우리 둘의 작업 방식을 계속 비교하고 연결시키니 화가 났던 것 같다. 완성된 작품의 모양이나 의미만 말하는 게 아니다. 미안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데 쏟는 헌신의 정도까지 차이가 있다. (294쪽)
어떤 선행일지라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정직한 동기보다는 불순한 동기가 훨씬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200쪽)
담배를 끼우는 두 손가락 사이가 눈에 띄게 얼룩이 진 걸 보고 깨끗한 손으로 피부를 긁어냈다. (…) 미래가 불안해져서 담배를 더 피웠다. (…) 미국에서는 세금 신고가 너무 번거로워서 사람들이 사설업체 측에 세금 신고 대행을 맡기는데, 그 업체들의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국세청이 계속 복잡한 구조를 고수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나도 누구에게 얼마를 납부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낸다. 별 걱정 없이 그렇게 하고 있다. (176쪽)
치아 사이에 유령 같은 이 음식물이 끼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 내내 귀걸이로, 그 다음엔 뻣뻣한 이쑤시개로, 그 다음엔 신용카드로 쑤셨는데 (…) 입에 피가 가득 고였다. (…) 한동안 소금 풀에 들어가 있었는데 소금이 몸에 난 모든 상처를 따갑게 만들었고, 깨물었던 손가락 상처 안으로도 소금물이 들어갔다. 나는 극단적인 성격이라 온도를 느끼는 통상적인 감각이 둔해지고 그저 그것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찬물과 따듯한 물 사이를 여러 번 오가는 걸 좋아한다. 이때 가장 행복하다. (293쪽)
잘 해보려고 애쓰고 또 애써 봐도 부엌 바닥에 떨어진 당근 한 조각을 보며 내 삶이 무너져 내렸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차 때문도 아니고, 어른이 되어서도 아니고, 그저 떨어진 당근 때문에 말이다. (343쪽)
너무 많은 일정에 시달리면서 워라밸이 무너진 밀레니얼들이 번아웃이 되어 일상에서의 아주 간단한 잡무를 한없이 미루며 큰 손해까지 보곤 한다는 에세이 ‘밀레니얼 세대는 어떻게 번아웃 세대가 되었는가’로 큰 돌풍을 일으킨 앤 헬렌 피터슨의 <요즘 애들—최고 학력을 쌓고 제일 많이 일하지만 가장 적게 버는 세대>를 재작년에 읽었다. 현재는 괴롭고 미래는 전망이 없는 밀레니얼의 처지가 나열되는 동안 구구절절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버릇없을 정도로 솔직하고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데 여념이 없는 밀레니얼의 초상은 우리나라에서도 SNL 등지에서 희화화되기도 했는데, 동시에 밀레니얼은 벼랑까지 내몰린 세대이기도 하지 않을까. 한 친구는 내게, 우리는 아무리 죽어라 일해도 부모님들처럼 집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 했다. 밀레니얼의 근속연수는 점차 짧아지고 있지만 내 주변의 또래에게서 보이는 풍경은 자신과 세계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의욕적인 태도보다는 완전히 소진된 채 스러지는 뒷모습이다.
밀레니얼의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여기서 더 나빠져봤자, 라는 체념의 또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만큼 연약한 스스로를 돌볼 사람 또한 자신밖에 없다는 불신이 방어기제로 비어져나오는 것일지도. 그런 밀레니얼들은 시스템보다는 각자도생의 논리로 자신을 무장하지 않고서는 일상을 버틸 수 없다. 설령 내내 자학하며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더라도 원인을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자가 채찍질의 끝이 보람 없이 쳇바퀴를 무한히 돌리는 ‘불쉿 잡’(데이비드 그레이버)일지라도.
스스로 과연 어떤 사람인지 곰곰 들여다보는 시간은 우리가 더이상 타버리지는 않겠다고 결심하고 분연히 일어나게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잿더미에 불을 지르라’(<요즘 애들>)는 결말에는 다소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정확히 무엇에 반대하여,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 해명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무언가 도모해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잘 알기 위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당연한 귀결에도 조금씩 질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질문들이 빤해 보이는 것은 빤한 해답이 이미 있어서가 아니라 해답 없는 질문이 숱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신형철)이라는 말을 믿기도 한다…
이시 우드의 <퀸 베이비>는 화려한 작업의 이면에 담긴 눈물과 눈치들을, 그리고 그것들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품고 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솔직함이 스스로 서 있는 위태로운 토대를 고발하면서도 살아남아 증명했다는 자부심,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작업을 겸손하게 부정하는 수치심을 수시로 오가며 (의도치 않게) 자신의 아픔까지도 낭만화한다면, 불안과 우울을 자양분 삼아 지속되는 구조는 밀레니얼들을 얼마나 더 집어삼키게 될까.
밀레니얼이 어디에 다다라 있는지 <퀸 베이비>만큼 소상히 파헤치고 토로하는 일지는 드물다. 나는 그의 일기에 깊이 매혹되었고, 매 일기마다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리하여 내가 그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바로 나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다만 나는 ‘행복은 노예의 범주’(지젝)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복을 원하는 밀레니얼으로서 어떻게 내가 소진되지 않고 남을 착취하지도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